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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배반하다니… 35냥 받고 혼인 파기” 현재 100만원 상당 조선시대 이혼 합의서 공개

바람아님 2013. 7. 19. 10:59

“나를 배반하다니… 35냥 받고 혼인 파기” 현재 100만원 상당 조선시대 이혼 합의서 공개

"애통하구나. 가슴이 미어진다. 아내는 나와 함께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동고동락해 왔는데 뜻하지 않게 오늘 아침에 나를 배반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버렸으니 슬프다. 저 두 딸은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여 자랄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말이 나오기 전에

눈물이 흐른다. 칼을 품고 가서 그녀를 죽이는 것이 마땅한 일이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장차 앞길이 있기 때문이다. 십분

생각하여 용서하고 엽전 35냥(현재 100만원 상당)을 받고 우리의 혼인관계를 파기하고 보낸다." 조선시대 남성이 아내의 외도를

원망하면서 남긴 기록이다.

전북대 박물관이 17일 조선시대 이혼합의서 내용을 공개했다. 여기에는 최덕현이란 남성이 배신한 부인을 엽전 35냥을 받고 보내야

했던 절절한 심경이 담겨 있다.

조선시대 이혼은 오늘날처럼 법정에서 가려지지 않았다. 이혼은 쌍방간에 합의만 하면 가능했고 그것이 합법적 절차였다. 3년에

한번씩 이뤄지는 호구조사를 통해 호적은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단 이혼합의서는 작성해야 했다. 훗날 뒷말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최씨가 받은 35냥은 이혼합의금인 셈이었다.

조선시대 최덕현이란 남성이 배신한 부인과 엽전 35냥을 받고 헤어지면서 절절한 심경을 적은 합의이혼문을 전북대 박물관이 17일

공개했다. | 전북대박물관 제공

이혼합의서 내용으로 미뤄볼 때 자녀 양육은 남자 측에서 대부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혼합의서는 백성들이 글을 잘 몰라

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흥미롭다.

전북대 이종철 학예연구사는 "당시 이혼은 양측의 합의라는 합법적 절차에 의해 이뤄졌고 호구조사를 통해 호적에서 정리되는

방식이었다"면서 "아내의 배신에 의해 이혼이 이뤄진 경우도 있었으나 생계 때문에 돈을 받고 헤어지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전북대 박물관이 조선시대 이혼합의서와 함께 공개한 문서들 가운데는 당시 백성들의 고달픈 삶과 애환을 오롯이 담아낸 문건들이

적지 않다.

몹쓸 병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부득이 자식이나 자신의 몸을 노비로 파는 계약문서에는 하층민의 고단한

생활상이 그대로 묻어난다. 1872년 곽완석이란 백성이 가난을 이기기 위해 딸을 김생원에게 팔았다. 대가로 받은 돈은 100냥에

불과했다. 병환으로 누워계신 어머니가 소고기를 먹고싶다 하니 소를 잡게 해달라고 수령에게 호소하는 내용도 있다.

고위관리의 부패상도 드러난다. 조선 후기 양사헌이라는 사람은 노름빚 때문에 감옥에 갇혔는데 수령이 합의를 주선해 주겠다고

회유해 돈을 가로채자 공증을 요구하며 탄원했다. 탄원서 한쪽에는 "(잔말 말고) 처분을 기다려라"라는 수령의 글이 적혀 있다.

전북대 박물관은 고문서 2만50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대부분 15~20세기에 작성된 것이다. 전북대는 지금까지 1만7700여점의

문서를 우리말로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