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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8] 로마제국 멸망과 납 중독

바람아님 2013. 7. 26. 08:37

(출처-조선일보 2009.07.31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로마제국의 멸망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제기된 바 있다. 노예제 대농장(라티푼디움)의 비효율성과 노예 공급의 중단으로 경제가 전반적으로 불황에 빠진 점, 기독교를 비롯한 외래 종교의 전파로 군인들의 강건한 상무정신이 쇠퇴한 점, 국가 기구가 비대해진 데다가 과도한 세금과 인플레이션으로 민생이 파괴된 점 등이 흔히 거론되는 요소들이다. 하긴 로마제국이 왜 멸망했는지 묻기보다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는지 묻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할 정도로 말기의 로마제국은 중병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망국의 원인들의 목록에 한 가지 특이한 요소를 더할 수도 있다. 미국의 한 학자가 시민들의 납 중독을 중요한 요소로 거론한 것이다. 로마의 상층 계급 사람들은 음식을 조리하는 데 청동 그릇 대신 납으로 된 그릇을 사용하였고, 배수관과 물 단지도 납으로 만들었으며, 화장품·약·염료를 만드는 데에도 납이 많이 들어갔다. 특히 포도주를 잘 보존하고 단맛을 더 내기 위해 내부를 납으로 입힌 단지 속에 포도즙을 넣고 끓여서 맑은 액을 건져내어 포도주에 첨가했는데, 이런 과정에서 상층계급 사람들은 상당히 많은 양의 납을 흡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체내에 하루 1mg 이상의 납이 흡수되면 변비와 식욕 감퇴, 수족 마비로부터 시작해서, 남자들의 불임, 임신부의 유산 등이 유발될 수 있다. 그리하여 몇 세대에 걸쳐 서서히 집단적으로 납 중독에 걸린 상층 계급이 높은 사망률과 낮은 출생률을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동부의 권력 핵심 지역인 라벤나 같은 곳에서 특히 이런 현상이 심했다고 한다. 변방에서 이민족의 압박이 점차 거세졌지만 로마는 사회 지도층 인물들이 서서히 사라져 가면서 내부의 활력을 상실해 갔고 그 결과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서기 4세기 말에 이르면 밀라노 주교인 암브로시우스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반쯤 파괴된 도시들에 널린 시체들뿐"이었다고 한탄하였다.

납 중독이라는 하나의 요소로 로마제국의 멸망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어 보인다. 복잡다기한 역사 현상의 이면에는 이처럼 예기치 않은 흥미로운 측면들이 숨어 있다.


(참고)
라티푼디움(Latifundium)이란 ‘광대한 토지’라는 뜻의 라틴어로 고대 로마의 대토지소유제도를 말한다. 라티푼디움은 로마의 영토 확장과 영유지에 대한 처분법에 의해 성립·발전했다. 로마는 영토 확장과 함께 점령한 토지를 국유화하였으나, 유력자가 국유지를 점령, 사유화함으로써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또한 장기간의 전쟁으로 토양이 황폐해지고, 중소토지 소유농민은 오랜 기간의 종군으로 이농하게 되어 그들의 사유지가 유력자에게 넘어가 몰락하였고,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평정하면서 노예공급원을 확보하였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유력자의 토지겸병의 증가로 노예제에 의해 대규모 경영을 하는 대토지소유제가 크게 확대·발전하자,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운동이 발발했으나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이후 전쟁이 끝나 노예공급원이 줄어들어 노예제에 의한 경영이 실효를 얻지 못하자, 라티푼디움 경영은 노예제보다는 자유 소작제 형태로 점차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