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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20] 수카르노

바람아님 2013. 7. 28. 07:53

(출처-조선일보 2009.08.14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수카르노(1901~1970)는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로부터 인도네시아를 독립시키고 신생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동남아시아 침략이었다. 1942년 일본군은 인도네시아를 정복하고 군사정부를 설립한 후 이 나라의 독립운동 세력과 접촉했다. 일제는 이미 상세한 정보를 입수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카르노에게 접근, 그에게 일부 권력을 약속하는 대신 일제에 협력할 것을 종용했다.

수카르노는 조국의 독립을 이루는데 일본의 힘을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이런 제안을 수용했다. 일제는 네덜란드인 관리들을 구금하고 군사정부의 상급직에는 일본인들을 배치했지만 하급직에는 교육받은 인도네시아인들을 고용했다. 일제가 동남아 침공이 반(反) 제국주의 해방운동이라고 뻔뻔스럽게 강변하는 것이 이런 정황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구 식민세력을 대신한 또 다른 식민세력일 뿐이었다. 그들은 연합군과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네덜란드보다 더 악랄한 착취를 했다. 수카르노는 라디오 방송과 연설을 통해 일제에 대한 협력을 촉구했으며, 특히 일제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징병과 징용 작업에 앞장섰다. 1945년까지 계속된 자바 섬 주민들의 '지원병' 징집은 무려 200만명에 이르렀고, 수많은 농민이 '로무샤(勞務者)'로 동원되어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그 수치는 정확하지 않으나 400만명에서 1000만명 사이로 추산된다).

특히 30만명 가까운 자바 농민들이 해외 전선에 끌려갔는데, 이들은 버마-태국 철도 건설을 비롯한 여러 사업에 투입되었다. 일본군의 가혹 행위, 굶주림, 질병 등으로 인해 이들의 사망률은 80%에 이르렀는데, 이는 포로수용소 사망률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다. 이런 일 때문에 수카르노는 1943년에 천황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았으나, 그 자신은 로무샤 문제로 평생 괴로워했다고 한다.

일본군이 패망한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네덜란드의 군대 파견과 전쟁, 공산주의 봉기와 진압, 미국의 강력한 개입, 쿠데타와 독재 등의 격변이 계속되었다. 우리나라 해방 전후의 역사를 다른 나라의 사례와 비교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