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09.08.21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잔 다르크(1412~1431)는 프랑스 역사의 위대한 인물이자 동시에 신비에 싸인 주인공이다. 프랑스의 모든 집단과 단체는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잔 다르크를 끌어들이려 한다. 가톨릭교회는 신의 뜻을 수행한 성녀로, 보수파는 프랑스 왕실을 수호한 영웅으로, 좌파는 민중의 힘을 이끈 지도자로, 극우파는 프랑스 민족주의의 화신으로 잔 다르크를 그린다. 그런데 이 모든 다양한 해석에서 공통적인 것은 잔 다르크가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막강한 권위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저명한 역사가 마르크 페로는 《역사의 터부》라는 책에서 이와 관련된 개인적 경험을 이야기한 바 있다.
어느 날 그는 잔 다르크에 대한 텔레비전 토론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토론 준비를 하면서 의학자들의 과감한 주장들을 접하게 되었다. 잔 다르크의 전기를 보면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든지, 남자 옷을 입고 남자 같은 행동을 자주 했다는 식의 흥미로운 일화들이 많다. 19세기부터 많은 의사들이 정신과적인 접근을 통해 그녀가 망상에 빠진 히스테리 환자라거나 동성애자라고 주장했다. 특히 최근에는 그린블래트라는 내분비학자가 잔 다르크가 남녀의 생식기를 모두 가진 중성 인간일 가능성이 크다는 독특한 주장을 펼쳤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완전한 여성이지만 월경이 없고 이성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특징을 보인다고 한다. 실제로 잔 다르크의 동료 중 한 명인 장 돌롱은 그녀가 '젊은 여인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불편함'이 없으며 남성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증언을 하였다. 물론 이런 정도의 증거만 가지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하나의 가설을 제시해 볼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토론 석상에 나가보니, 애국적인 관점에서 평생 잔 다르크를 연구한 백발의 노학자와 루앙 대주교를 비롯한 신심 깊은 종교계 인사들이 잔뜩 나와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잔 다르크가 동성애자라거나 혹은 남녀 생식기를 다 가진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사회든지 이처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침묵을 강요하는 터부들이 많이 있다. 우리 사회 역시 사람들의 의식이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용감하게 터부를 깨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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