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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문화 기행] (3) 영국 에든버러‥'북부의 파리' 에든버러의 아름다움 뒤엔 감추고 싶은 슬픈 역사가…

바람아님 2013. 7. 27. 11:31
여관 운영하던 버크와 헤어, 해부용 시신으로 팔기 위해 투숙객 등 16명 '인간사냥'
해부학 교수들도 '신선한' 시체 확보하려 은밀한 커넥션                


16명의 시민을 살해,해부용 시신으로 팔아넘긴 범인들이 체포됐다는 소식에 에든버러 시민들은 전율했다. 사건은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로 친구 사이인 윌리엄 버크와 윌리엄 헤어가 공모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연쇄살해를 모의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구시가 남부 웨스트 포트에서 여관을 운영하던 헤어는

어느 날 그곳에 하숙하던 노인이 4파운드의 밀린 방세를 갚지 않은 채 죽자 친구 버크와 함께 시신을 팔아넘기려 에든버러대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한 학생이 이들을 서전스 스퀘어에서 사설 해부학 강습소를 열고 있던 로버트 녹스 박사에게 안내했다. 실습용

시신을 확보하지 못해 애태우던 박사는 재료의 신선도에 만족하며 그들에게 7파운드10실링을 지급했다.

버크와 헤어는 뜻밖의 수입에 눈이 번쩍 뜨였다. 자신들이 한 달 이상 힘들게 일해도 만지기 어려운 거금을 시신 한 구로

벌었으니 말이다. 전 영국을 경악시켰던 희대의 참극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사건의 무대인 에든버러는 스코틀랜드의 수도.'북부의 아테네''북부의 파리'로 불릴 만큼 빼어난 경관으로 유명하다. 특히 시의

동북부에 자리한 칼튼 힐에서 바라본 구시가 풍광은 방문객의 넋을 앗아가고도 남을 정도다. 회색빛 석조건물들의 절묘한

어울림과 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짙은 세월의 향기는 보는 이의 폐부를 찌른다.

에든버러의 영광은 이곳이 유럽 계몽주의의 중심 센터로 자연과학 발전과 경험철학의 진원지 역할을 했다는 데 있다. 특히

이곳은 오래 전부터 의학교육의 메카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버크와 헤어의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난 19세기 초 에든버러의 의학교육은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당시 영국 법령이

사형수 시신 이외의 해부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형 집행도 크게 줄면서 만성적인 시신

부족 현상은 가속화했다. 교육의 부실화는 불을 보듯 뻔했다. 에든버러대 의대생이었던 찰스 다윈이 의학 공부를 포기한 것도

이러한 열악한 학습환경 때문이었다.

이런 틈새를 비집고 부와 명성을 추구하는 부류도 있었다. 일부 의학자와 해부학자들은 에든버러대 옆에 사설 강습소를 열어

은밀히 해부학 수업을 진행했는데 로버트 녹스는 특유의 달변과 능란한 메스질로 스타강사로 통했다. 그러나 강좌의 성패는

뭐니뭐니 해도 실습용 시신 확보에 달려 있었다. 이를 위해 녹스 등 해부학자들은 시체도굴꾼과 은밀한 커넥션을 맺고 '신선한'

시체를 가져오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돈을 지급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시체 빼돌리기와 도굴이 만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체 빼돌리기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 버크와 헤어는 좀 더 쉬운 방법을

택했다. 산 사람을 사냥해 시신으로 둔갑시키는 것이었다. 버크의 애인인 헬렌 맥도걸과

헤어의 부인 마거릿도 이 '유망' 사업에 힘을 보탰다.

초기 타깃은 헤어의 여관에 머물던 병든 하숙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고객들을 위스키로

취하게 한 후 코와 입을 막아 질식시켜 죽였다. 병든 투숙객이 고갈되자 버크 일당은

이번에는 부랑자,거지 등으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구시가의 중심인 로열 마일로 나가

이곳을 떠도는 노숙자들을 재물로 삼았던 것이다. 로열 마일은 에든버러성에서 홀리루드

궁전으로 이어지는 언덕을 따라 조성된 유서 깊은 거리로,이곳에는 옛 시의회,시청사 등

관공서와 존 녹스가 종교개혁 운동의 불을 지폈던 성 자일스 성당 등이 자리해 지금도

중세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로열 마일에서의 사냥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지 버크와 헤어는 지인과 친척까지 살해자

명단에 올렸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1년을 끌어온 이들의 사람사냥은 결국 마조리

캠벨 도셔티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헤어의 여관에 함께 투숙했던 그레이 부부가 침대 밑에서

시신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찰이 출동했을 때 방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사건을 맡은 변호사는 증거 확보가 어렵게 되자 헤어에게 면책권을

부여하는 조건으로 버크의 유죄를 입증하도록 유도했다. 결국 헤어는 입을 열었고,버크는 죄를 혼자 뒤집어쓴 채 로열 마일의

한복판에서 공개처형됐다.
버크의 시신은 곧바로 에든버러 의대에 보내져 시민들이 보는 가운데 해부됐다. 녹스 박사는 처형은 면했지만 해부학자로서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어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한 의회는 사건 발생 4년 후 합법적인

실험용 시신의 확대 공급을 규정한 인체해부 법안을 통과시켰다.

버크와 헤어의 사건은 종교와 윤리가 경험과학 발달이라는 현실 앞에서 새로운 해결책을 방기하는 사이 벌어진 종교와 과학의

분열증,인간의 도덕적 양심과 내적 욕망의 분열증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에든버러의 근대는 이렇게 짙은 먹구름을 헤치고

밝아왔다.

정석범 미술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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