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말 한마디에 전기료 누진은 경감하고부실 대우조선·한진해운엔 누구도 '칼' 못대책임 두려워 미루다보니 정책 곳곳 시한폭탄화
◆ 현상 유지 함정(Status-Quo Trap)
의사결정에 따르는 책임을 두려워해 관성에 의존하는 '현상 유지의 함정'은 이른바 '변양호 신드롬'으로 상징되는 한국 관료들의 최고 난제다. 최근 한진해운 법정관리로 불거진 해운 구조조정 실패의 이면에는 관료들의 무능과 복지부동이 자리하고 있다. 해운 경기와 경영 상황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는데도 수년간 방치함으로써 구조조정 비용을 크게 키웠다는 지적이다. 글로벌 경기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적절히 칼을 들이대지 않은 채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이다.
대우조선도 비슷한 경우다. 대우그룹 해체 후인 2000년 산업은행 계열에 편입된 이후 "굳이 서두를 필요 없다"며 매각을 미루다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를 초래했다. 결국 해운플랜트 부실 등과 맞물려 지난해 2조9000억원대 적자를 냈다.
◆ 닻 내리기 함정(Anchoring Trap)
대통령이나 장관의 말 한마디에 이견이나 반박 없이 정책 기조가 결정돼 버리는 권위적 의사결정 구조도 문제다. 배가 닻을 내리면 그 자리에 멈춰 서듯 윗선의 말 한마디에 따라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닻 내리기 함정'이 횡행하고 있다.
지난달 전기료 누진제 개편에 '절대 불가'를 고수하던 산업통상자원부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태도를 바꿨다. 주한미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사드 배치 용지가 경북 성주의 성주포대로 결정된 뒤 "여러 기준에 따른 최적합 용지"라던 국방부는 박 대통령이 TK(대구·경북) 의원들과의 만남에서 "새로운 지역이 있다면 면밀하게 조사할 것"이라고 하자 바로 입장을 바꿨다.
2014년 이른바 '연말정산 파동'도 같은 패턴을 따랐다. "연말정산 개편은 없다"던 기획재정부가 박 대통령이 "국민께 어려움 드리지 않도록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발언하자, 바로 당일 입장을 정반대로 바꿔 연말정산 개편 방안을 발표했다.
고정관념에 갇혀 문제의 본질이 아닌 겉모습에 따라 정책이 결정되는 '틀 설정(프레이밍)의 함정'은 노동법 개정을 놓고 부정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기간제법, 파견법을 비롯해 19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노동개혁 법안은 '노동개혁=친기업·비정규직 양산'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당초 노동개혁 '5대 법안'에 포함됐던 '기간제법'은 35세 이상의 근로자가 희망한다면 최대 4년간 기간제 근무를 허용해 비정규직의 안정적인 고용을 보호하는 게 취지다. '파견법'도 마찬가지다. 고령자나 전문직 등 파견 허용 직종을 늘리고, 인력난을 겪는 뿌리산업에 대해 파견근로를 허용하자는 내용이다. 정부는 뒤늦게 기간제법은 '비정규직 고용안정법'으로, 파견법은 '중장년 근로자법'으로 이름을 바꿔 여론전에 나섰지만 판세를 뒤집지 못했다. 한번 짜인 이념의 프레임은 너무나 견고했다.
◆ 매몰비용 함정(Sunk Cost Trap)
이미 지출해 회수할 수 없는 비용에 집착해 정부가 더 큰 정책 오류의 늪에 더욱 깊이 빠지는 것이 '매몰비용 함정'이다. 합리적 판단은 미래의 비용과 편익만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과거에 발생한 매몰비용은 '본전 생각'에 빠진 정책결정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미래 정책 결정에 악영향을 끼친다.
결국 지난달 법정관리 수순을 밟기까지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은 STX조선은 매몰비용에 묻혀 채권단이 신속한 정책 결정을 내리지 못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2013년 4월 자율협약에 돌입한 STX조선에 대해 채권단은 기존 채무 4조원의 상환을 유예해주는 한편 4조5000억원을 새로 지원하는 악수를 뒀다. 이미 들어간 돈이 워낙 많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 지원을 이어간 셈이다.
[기획취재팀 = 이상덕 기자 / 전정홍 기자 / 정의현 기자 / 이승윤 기자 / 나현준 기자 / 부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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