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저 아이의 장래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구나. 예쁘게 생긴 데다 어미를 닮아 정(情)이 깊고 외곬으로만 생각하는 기질이 있어서...이대로 이국땅으로 끌려간다면 어떻게 될까?”
이미 고인(故人)이 된 일본 작가 모리 레이코(森禮子)의 소설 ‘삼채(三彩)의 여자’에 들어 있는 한 대목이다. 이 소설은 포로로 끌려가 일본에서 생(生)을 마친 실존 인물 ‘오다 줄리아’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물론,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이 혼재돼 있다.
소설 속의 또 다른 가슴 저미는 상황이다.
“며칠 후의 이른 새벽. 포로들과 그들의 가족은 작은 배에 실려 바다 위에 떠 있는 큰 군선으로 옮겨졌다. 배에는 이미 많은 포로들이 잡혀 와 있었고, 배 전체는 울음바다가 되어 통곡을 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포로의 몸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민초들의 ‘통곡’이 들리는 듯하다. 적게는 5만, 많게는 15만 명의 포로가 일본으로 끌려가지 않았던가.
역사적 진실을 찾아서
필자는 얼마 전 규슈(九州)에 갔다. 검은 구름이 사라지고 다시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목적지는 구마모토(熊本)현에 있는 야쓰시로(八代) 박물관이었다. 도리쓰 료지(鳥津亮二·39)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월요일이어서 박물관이 휴관인데도 그는 필자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열었다.
박물관 사무실에서의 도리쓰 씨 |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 대해서 아무도 정확하게 연구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2002년 야쓰시로(八代) 박물관에 근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고니시(小西)’와 ‘오다 줄리아’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우도학 연구 제35호> ‘유럽의 사료(史料)에 의한 고니시 유키나가·줄리아 오다(아)의 특집호’ 논문의 저자이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고니시(小西)가 처형당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크리스천에 대해서 다소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했었죠. 그런데, 1612년 이에야스 측근들의 사건을 계기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불신이 폭발, 금교령(禁敎令)이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크리스천 다이묘(大名) 고니시(세례명: 아우쿠스티누스)에 대한 연구를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역사는 승리한 자에 의해서 기록되는 것일까. 패장 고니시의 흔적은 일본에서도 오랜 세월동안 수면아래 가라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영주로 있었던 우도시(宇土市) 교육위원회에서 도리쓰 료지(鳥津亮二)씨에게 연구를 의뢰한 것이다.
“이 연구 논문은 1588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히고(肥後)국에 입국해서 우도(宇土)를 거점으로 마시키(益城)·아마쿠사(天草)·야쓰시로(八代)를 다스렸기 때문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그의 활동상황을 정리했습니다. 물론, 유럽의 자료를 토대로 한 것입니다.”
구마모토 현 야쓰시로(八代) 성터 |
오다 줄리아의 연구에 대하여
“조선에서 태어난 줄리아는 임진왜란 때 고니시에 의해 포로가 되어 히고(肥後)에 온 조선인 포로 중의 한 명입니다. 그 당시 많은 포로 중에서 여인의 몸으로 크리스천으로 생을 마감한 여성이기에 더욱 돋보인 것입니다.”
도리스씨 가 쓴 논문 |
도리쓰 죠우(鳥津亮二)씨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연구함과 동시에 오다 줄리아의 생애(生涯)를 조명해서 논문의 부록으로 실었다. 필자가 그의 논문을 나름 열심히 읽었기에 대화가 훨씬 수월하게 진행됐다. 오히려 그의 반문이 있었다.
“이 논문을 어디서 구하셨나요? 일본인도 아닌 한국인이 저의 논문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지난 2014년 10월 24일 쓰시마(對馬)에서 극단 와라비좌(座)가 줄리아에 대한 뮤지컬 공연을 했었죠. 그 때 선생의 논문과 저서 <小西行長>을 구입했습니다.”
“그러시군요. 그 뮤지컬은 그해 10월 1일 우도(宇土)에서 첫 공연을 한 후로 오이타(大分)·나가사키(長崎) 등 규슈지역을 순회했었죠.”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많은 책들이 발간되고 뮤지컬 등이 등장했으나, 검증이 안된 부분이 많아서 저는 '루이스 데 메디나' 신부의 예수회 기록을 근거로 했다’라고 말했다. 역사 전문가의 입장에서 밝힌 것이다.
줄리아의 이름에 대하여
“줄리아에 대해서 ‘오다아’가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줄리아에 대한 일본 측 자료로 유일한 사료(史料)가 있습니다. 일본의 부코우잣키(武功雜記)입니다. 여기에는 ‘御다아’로 기록돼 있습니다. '메디나' 신부의 기록에는 로마자 표기가 ‘Ota’ ‘Vota’이었으나 50음의 적용으로 ‘오-다’가 적용된 듯 합니다. 그 후 한자로 ‘大田’ 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다의 이름은 이 외에도 ‘조선에서 오다’, ‘얻어온 아이’ 등 여러 가지 설(說)이 있으나 도리쓰(鳥津)씨는 ‘줄리아’라는 세례명이 '가장 정확하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오다아 일까, 오다 일까, 이름일까, 성(姓)일까. 확정히 하고 싶습니다만 어떠한 근거 자료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회의 기록은 일관되게 그녀에 대해 '줄리아'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1596년 5월 베드로 모레혼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서 '줄리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논문을 읽어보셨겠지만, 저 역시 오다아를 빼고 ‘줄리아’로 통일했습니다.”
고즈시마에서 나와 나가사키, 오사카에서 활동해
“하신토 살바네스(H. Salvanez) 신부가 1620년 사람들에게 나가시키(長崎) 발신으로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그 편지에는 줄리아가 고즈시마에서 나와 본토에서 생활했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리쓰(鳥津)씨는 자신의 논문 91쪽을 펼치면서 '줄리아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고즈시마에서 나와 나가사키 등에서 활동했다'는 근거를 제시했다.
약간 심각한 얼굴의 도리쓰씨 |
<고려에서 태어난 줄리아는 로자리오를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으로 그녀는 성 콘프라디아(Confradia)를 위해 항상 일하고 있었기에 몇 번인가 자신의 집에서 추방되어 이제는 집도 없이 이집 저집 옮겨 다니고 있다.>
성 콘프라디아(Confradia)는 로자리오 기도를 장려하기 위해 도미니코회 수사들에 의해 창립된 '심신회'이다. 이 편지의 내용으로 보면 줄리아는 이 단체를 도우면서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성가를 부르게 한 이유로 봉행소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이는 안효진 씨의 논문 <오다 줄리아의 생애와 영생>에도 나와 있다.
도리쓰(鳥津)씨는 ‘이 후의 줄리아의 행방은 프란시스코 파제코(Francisco Pacheco) 신부의 서간문에 기술돼있다’고 했다. 파제코 신부는 포르투칼 출신 예수회 소속 선교사로 나가사키·오사카·교토에서 포교 활동을 한 인물로 편지를 쓰기 전에 일본 관구장이 됐다. 그의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앙을 위해 추방된 고려인 줄리아는 지금 오사카(大阪)에 있다. 나는 이미 도움을 주었고 할 수 있는 한 그녀를 돕고 있다.>
“줄리아에 대한 기록은 현 단계에서 이것이 최후의 것입니다. 이 기록에 나타난 바와 같이 줄리아가 고즈시마에서 나와서 나가사키·오사카 등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언제 생을 마쳤는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리스(鳥津) 씨는 줄리아 제(祭)을 해마다 열고 있는 고즈시마에서 ‘심포지엄의 연사로 초청했다’는 것을 언급했다. 필자의 질문이다.
“저도 2008년 고즈시마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심포지엄에 참석하셨나요?”
고즈시마와의 이야기를 밝히면서 웃는 도리쓰 씨- |
“아니요. '줄리아가 고즈시마에서 나와 나가사키·오사카 등에서 활동했다고 발언해도 됩니까?' 라는 한마디에 초청 연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