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궁궐을 벗어나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한 '아관파천'. 임금이 야밤에 도망치듯 궁녀의 가마에 올라타며 망국 조선의 현실을 몸소 보여준 이 사건은 조정 내 친러파와 함께 주한 러시아 공사를 지낸 외교관 카를 베베르가 주도한 것으로 그동안 알려져 왔다.
그러나 막후에서 피신 계획을 꾸미고 고종을 호위할 러시아 군대까지 끌어들인 외교관 알렉세이 스페예르의 역할이 최근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동해연구실장은 논문 '주한 러시아 공사 스페예르의 외교활동과 한국정책'에서 "아관파천 직전 정황을 살펴볼 때 러시아측 핵심 인물은 스페예르였다"고 단언한다.
우선 아관파천이 있었던 1896년 2월11일 주한 러시아 공사는 베베르가 아닌 스페예르였다. 스페예르는 1895년 7월 베베르에 이어 주한 공사로 임명됐고 베베르는 당시 '대기발령' 상태로 한국에 머물며 비공식 외교 자문 역할을 했다.
아관파천 전후의 사정은 이렇다. 고종은 1896년 1월9일 "러시아로부터 도움을 기다리고 있으며, 나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라"는 내용의 비밀편지를 스페예르에게 보낸다. 스페예르는 2월1일 고종을 접견한 뒤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해군중장 알렉세예프에게 "고종이 폭동 탓에 위험하니 함정을 제물포로 신속히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2월2일 고종의 편지를 받고 피신 의사를 본국 외무대신에게 전한 인물도 스페예르였다.
러시아 공관을 방어할 해군을 한양까지 불러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외무부 명령을 받지는 않았다. 고종의 피신에 대해서도 본국의 확답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다른 나라 군주의 거처를 자국 공관으로 옮기는 외교적 중대사를 자체 판단으로 결정한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아관파천을 나중에 보고받고 승인했다. 그러나 스페예르를 곧바로 주일 공사에 발령낸다. 러시아는 원래 일본과 우호관계를 형성하고 한국에서는 현상유지를 한다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반면 스페예르는 러시아가 조선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다소 엇갈리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 결과가 아관파천이었다.
스페예르는 일본으로 임지를 옮겨서도 조선 문제에 계속 관여한다. 일본 군대가 경복궁 앞에 주둔하는 상황에서 일본이 경제를, 러시아가 군사를 주도해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실제로도 러시아 군사교관의 한국 파견이 성사됐다.
스페예르는 일본에서도 고종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고종은 1897년 봄 당시 주일 공사 스페예르에게 황제 칭호 선포 계획에 대한 자문을 구한다. 스페예르는 고종에게 하사받은 어진을 주일 공관에 모셔놓고 당시 공관을 방문한 러시아 특명전권공사 민영환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는 러시아 최고의 조선 전문가를 자처하며 고종과 개인적 친분을 쌓았지만 조선을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스페예르는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음모'를 한국인 고유의 특징 중 하나로 꼽는가 하면 고종을 포함한 지배계급에 뇌물은 필수적이라고 전했다. 부정부패 탓에 자주독립을 위한 최소한의 도덕적 수준을 확립할 수 없다고도 했다. 철저히 자국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외교관이었던 셈이다.
김 실장은 스페예르의 아관파천 보고서 등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의 기록을 토대로 그의 외교활동을 복원했다. 이 논문은 23일 열린 상명대 역사문화연구소 심포지엄에서 발표됐다.
김 실장은 "스페예르는 극동에 파견된 러시아 외교관 중 긴급 현안을 적극 해결하는 한국 문제 전문가였다"며 "아관파천을 주도한 그의 외교활동과 한국에 미친 영향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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