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를 존경하지만 좋아하진 않는다. 고결한 인품과 우국충정에 공감하지만 엘리트주의와 남녀차별주의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옥의 글을 찾아 읽는 까닭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 글에 담긴 시대적 감각이다. “하루의 저녁도 오히려 슬퍼할 만한데, 일 년의 저녁을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이옥의 탄식은 사회적 병폐가 누적되고 왕조의 기운이 쇠미해져 가는 시대적 분위기를 엿보게 한다.
이옥의 시대는 조선의 가을이다. 영조와 정조의 개혁이 사회를 일신시켰지만, 정조 사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쇠락의 입구에선 시대에 대한 번뇌와 회한이 피어오르는 법이다. 역사의 유비(類比)를 즐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해가 지는데 갈 길은 먼 일모도원(日暮途遠)의 심사는 이옥의 시대나 우리 시대나 다르지 않다. 저성장ㆍ불평등ㆍ인구절벽을 관류하는 불안과 분노의 마음은 이옥의 글을 이 가을에 들춰보게 한다.
다른 하나의 까닭은 개인의 생애에 대한 통찰이다. 이옥은 “노인이 된 자는 어찌할 수 없다고 여겨서 다시 슬퍼하지 않을 것인데, 사십 오십에 비로소 쇠약해짐을 느낀 자는 유독 슬픔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옥은 정조가 단행한 문체반정(文體反正)의 희생자였다. 결국 그는 경기도 남양(지금의 화성)에 칩거해 글을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개인의 생애사적 관점에서 이옥의 가을은 더욱 쓸쓸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장년에서 노년으로 가는 인생의 가을에 대한 이옥의 감각이다. 공자에 따르면 쉰이면 지천명(知天命)이다. 하지만 마흔과 쉰이 되면 유독 슬퍼진다고 이옥이 탄식했듯, 오늘날 쉰이 지천명은 아니다. 마흔을 가리키는 불혹(不惑)에도 아직 도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기대 수명이 늘어난 탓이다. 우리 시대 50대의 경우 적어도 80세를 넘어 산다고 볼 때 쉰은 성년이 된 스물에서 절반의 30년이 지난 시점이다.
세대론적 시각에서 보면 현재 50대는 ‘사이 세대’다. 산업화 세대인 부모세대와 디지털 세대인 자녀세대 사이에서 두 개의 문화와 규범을 때론 강제적으로, 때론 자발적으로 내면화한 세대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당연히 품고 있으면서도 자녀가 좋아하는 파스타의 종류를 익혀야 하는 세대가 바로 이들이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뿌듯한 기억이 있으면서도 외환위기를 견뎌낸 후 이제 자녀 청년실업을 걱정해야 하는 게 이들의 자화상이다.
남은 30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하루의 저녁이 오면 (…) 뜰의 나뭇잎이 잠잠해지고, 날개를 접은 새가 처마를 엿보고, 창연히 어두운 빛이 먼 마을로부터 이른다면 그 광경에 처한 자는 반드시 슬퍼” 하게 된다고 이옥은 묘사한다. 어두운 저녁이 오면 깜깜한 밤이 멀지 않다. ‘밤으로의 긴 여로’만 남아 있는 삶을 이대로 맞이할 순 없다.
내가 정말 우려하는 것은 노년을 맞이하는 개인사적 두려움과 가시화하는 인구절벽의 사회 구조적 압박이 중첩된 현실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은 지난해 13.1%에서 2026년 20%를 넘어서고 2030년 24.3%, 2040년 32.3%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생산가능인구가 아닌 ‘늙은 대한민국’이 결코 머지않은 미래다.
인생의 가을, 사회의 가을이 온다고 해서 마냥 슬퍼할 수만은 없다. 사회를 연구하는 이로서 내 바람은 소박하다. 서서히 열리는 19대 대통령선거에서 인구절벽과 저출산ㆍ고령화 대책이 제 1의제는 아니더라도 제 2의제가 돼야 한다. 아동수당, 경력 단절, 노후 일자리, 노령연금 등의 제도적 개혁은 물론 양성평등, 평생학습 등과 같은 문화적 혁신을 포함한 정책 대안들에 관한 치열한 토론이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 늙어가는 대한민국을 더 이상 이렇게 놓아둘 순 없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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