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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의 눈]갈 길 잃은 애국심

바람아님 2016. 11. 30. 23:34

이데일리 2016.11.30 06:00


베이징에서 두번째 겨울을 맞이하면서 익숙함과 생소함이 교차하고 있다. 한국에서라면 호들갑을 떨며 외출을 자제할 정도의 스모그에도 이제 마스크 하나면 충분하다며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어느새 적응이 되었나 보다 했는데 최근 더욱 낯선 풍경이 생겼다. 바로 중국인들의 시선이다. 그동안 느껴온 친근함, 부러움, 나아가 약간의 선망의 감정 따위는 온데간데 없고 조롱과 무시의 눈빛이 역력하다.


중국 젊은층들은 특히 한국인에 대해 친절하고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한국 연예인이나 드라마, K팝, 화장품, 여행 경험 등에 대해 흥겹게 이야기하곤 했다. “한국인처럼 생겼다” “한국사람인 줄 알았다”는 말에 그들은 “내가 정말 그래. 너무 고마워”라며 진심으로 기분 좋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엔 이런 반응을 기대하기 어렵다. 사드 갈등에서 시작된 반한(反韓) 감정이 국정농단 사태로 절정에 이르며 한국 이미지가 크게 실추된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얼마 전 만난 한 중국인 친구는 한국의 현실을 조롱하는 듯한 얘기를 무심코 던져 이에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씁쓸한 여운은 꽤 오래 남았다.


문제는 갈수록 더 큰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간인 국정농단을 넘어 비아그라와 각종 주사 등 상상할 수 없었던 스캔들과 범죄 혐의에 국가 원수가 얽히면서 외국인들은 그저 흥미진진하다는 반응이다. 대한민국 국격이 한없이 추락하는 느낌이다.


급기야 재외동포들마저 촛불을 들었다. 유학생이나 외국 기업에 파견돼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전 세계적으로 약 700만명에 이른다. 최근 한 달 사이 50개국에서 재외동포들이 시위 집회를 열고 시국성명서를 발표했다. 공안당국이 집회와 시위를 엄격히 통제하는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에서도 실내 집회와 온라인 시위가 펼쳐질 정도로 분노의 기운은 뜨거웠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에서 많은 동포가 한목소리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한 것은 100여년 이민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라고 한다.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결정에 이어 도널드 트럼프가 차기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자국 중심의 민족주의 바람이 불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보호무역주의, 정치외교적으로는 신(新)고립주의로 발현되는 모습이다.

트럼프는 기존 무역질서를 뒤바꿔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겠다며 엄포를 놓고 있고 중국도 미국 기조 변화를 이용해 남중국해 등 아시아에서의 패권 장악을 꿈꾸고 있다. 이 가운데 우리는 강대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가 돼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중국으로부터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다. 여기에 전례없는 국정농단 사태가 더해지며 대한민국호(號)는 방향타를 잃고 표류하는 양상이다.


외국에 나오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했는데 이 역시 옛말이 된 모양이다. 굳이 이번 사태로 인한 부끄러움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시야를 넓혀 유학파 귀국률을 살펴보면 한국과 중국의 격차는 이미 상당히 벌어졌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한국인 유학생 가운데 10명 중 6명이 귀국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귀국해봐야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렵고 기업 문화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최근 들어 더욱 확산되는 추세다. 반면 중국인 유학생의 귀국률은 70%를 넘어서고 있다.


이래저래 이국 땅에서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지키고 살기 쉽지 않은 요즘이다. 처음 중국에 와서 곳곳에 스며든 한류(韓流)의 흔적을 느끼며 뿌듯해했던 기억이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늘 북적거리고 떠들썩했던 베이징 한국 식당을 가봐도 최근에는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은 모습이다.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조국을 아끼고 사랑하는 700만 재외동포의 애국심이 갈 길을 잃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디 이번 사태가 대한민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베이징= 이데일리 김대웅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