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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박정자]프랑스혁명의 진짜 희생자들

바람아님 2016. 12. 2. 23:19
동아일보 2016.12.02 03:01

"빵 없으면 케이크 먹어라".. '고백록' 구절, 왕비의 말로 둔갑
군중의 분노는 극에 이르고 마리 앙투아네트 단두대 세워
50만 명이 희생된 프랑스대혁명 널리 믿어지는 것과는 달리 팔 할이 귀족 아닌 평민

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

 출신이 좀 수상한 라모트 백작부인은 로앙 추기경에게 왕비의 가짜 편지를 전달한다. 장관 자리를 노리고 왕비에게 접근할 기회를 찾고 있던 추기경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자신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고 착각한다. 실제로 백작부인은 어느 날 밤 베르사유궁 정원에서 왕비를 닮은 한 창녀를 대역으로 삼아 추기경과 가짜 왕비의 밀회를 주선하기까지 한다. 추기경은 깜빡 속아 넘어가고, 백작부인은 자선 사업에 쓴다고 속여 추기경으로부터 여러 차례 돈을 받아 가로채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고 싶다는 왕비의 가짜 편지를 전달한다. 추기경은 보석상에게 목걸이를 주문하고, 왕비의 친필 사인이라고 믿은 보석상은 추기경에게 목걸이를 보낸다. 만기일까지 돈이 입금되지 않자 보석상은 왕비에게 청구서를 보낸다. 목걸이는 이미 백작부인의 남편이 가로채 런던으로 빼돌려진 뒤였다.

 수많은 문학 작품에 모티프를 제공했던 이 희대의 사기 사건은 4년 후 일어날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창녀는 왕비의 대역을 자백했고, 가짜 편지를 쓴 라모트 백작부인은 태형(笞刑)에 처해진 후 양쪽 어깨에 ‘도둑(voleuse)’의 첫 글자인 v 낙인이 찍힌 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을 통해 진범이 가려졌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무 상관없음이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공식 재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비에 대한 나쁜 소문들이 무책임하고 악의적인 신문과 팸플릿들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프랑스어 원문은 brioche)를 먹으면 되잖아요”라는 말도 원래는 루소의 ‘고백록’의 한 구절인데 마치 왕비가 한 것인 양 악의적으로 선전되었다. 이 말 한마디로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제 마리 앙투아네트는 굶주리는 민중의 아픔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비정하고 철없는 왕비, 또는 베르사유궁에서 매일 밤 파티만 여는 사치와 향락의 왕비가 되어 있었다.


 소문은 점점 더 수위가 높아져, 당시 팸플릿에서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피에 굶주린 괴물 부부로 묘사하기도 했다. 특히 왕비는 온갖 방탕한 쾌락에 몸을 내맡긴 색정광이 되어 있었다. 이성 간의 섹스는 물론이고 대공 부인들이나 여자 사촌 등, 주위의 모든 여자들과 동성애를 했다는 것이다. 왕비의 섹스 스캔들은 인류 문명의 금기인 근친상간에까지 이르렀다. 이미 어릴 때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태자 요제프 2세에게 처녀성을 잃었고, 프랑스로 시집 온 후에는 루이 15세의 정부가 되었으며, 시동생인 아르투아 백작의 아들과도 연인 관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패륜, 즉 자신의 여덟 살 난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혐의까지 뒤집어썼다. 


 1793년 10월 12일, 남편의 성을 따라 ‘카페 부인’으로 호명된 왕비가 국민 공회에 불려 나왔다. 흰색의 헐렁한 평민복을 입었고, 신발은 해어졌으며, 흰 머리칼은 목 근처에서 덤벙덤벙 잘려져 있었다. 38세의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노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몸매에는 아직 왕비로서의 품위와 우아함이 배어 있었다.

 국고 탕진, 내란 음모, 적과의 내통. 미동도 하지 않고 자신의 혐의 내용을 듣고 있던 왕비가 여덟 살짜리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마지막 죄목이 낭독되자 한순간 격한 감정의 동요를 보이며 청중석의 여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러분들, 이 말이 믿겨지시나요?”


 청중도 술렁였다. 비록 왕비에게 적대적인 평민들이었지만, 그리고 왕비에 대한 동정이 큰 위험을 내포하는 시대였지만, 많은 여성들이 경악하여 입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순간 왕비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모든 사람들의 돌팔매 속에서 누군가 내 말을 수긍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하나라도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절망적인 사람이 느끼는 편안한 안도감이었다(미셸 모런 ‘마담 투소’). 나흘 뒤 그녀는 혁명광장(지금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군중의 환호 속에 처형되었다. 단두대의 널빤지를 오르며 실수로 사형집행인의 발을 밟은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고의가 아니었어요.”


 프랑스 대혁명은 총 50만 명 이상의 목숨을 희생시키고야 끝이 났다. 기요틴에서 처형된 사람만도 4만 명이 넘었다. 널리 믿어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 희생자들 중 80% 이상은 귀족이 아닌 평민이었다.

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