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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기자 칼럼] "속지 말자, 이 꼴 난다"

바람아님 2016. 12. 6. 23:08
조선일보 : 2016.12.06 03:15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세상 일은 '될 대로 되는 것'입니다."

연일 이어지는 어지러운 뉴스를 읽다 8년 전 법정(法頂·1932~2010) 스님과의 만남에서 들은 이 말이 떠올랐다. 스님이 말한 '될 대로'는 일반적으로 흔히 생각하는 자포자기(自暴自棄)가 아니다. 스님은 '될 대로'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준비된 대로'라는 뜻입니다. 씨앗을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자업자득(自業自得)', 즉 '업(業)'의 엄중함을 강조한 이야기다.

미신적 요소를 꺼리는 스님이었지만 여러 법문에서 '업'과 '업의 파장(波長)'을 자주 강조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곧 업이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와 같은 씨앗이 뿌려지는 것입니다." 그는 또 "죽고 난 후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집? 예금? 명예? 모두 아니다. 오직 덕(德)이 삶의 잔고(殘高)로 남는다"고도 했다.

스님이 업을 강조한 것은 다음 생에 잘 살자는 뜻만은 아니다. '지금, 여기'를 잘 살고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한다는 쪽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부모가 지은 업이 자녀에게 영향을 미쳐 고통받는 모습을 보게 되는 사례까지 법문에서 소개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금생(今生)에 지은 업이 윤회한 후 다음 생의 자신에게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금생의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는 뜻이었다.


2008년 11월12일 법정스님이 서울 명륜동의 한 시인의 집에서 새로이 선보이는 책과 관련하여 
사부대중에게 전할 법문을 말하고 있다. /이진한 기자
천주교 대표 지성으로 꼽히는 원로 정의채(91) 몬시뇰의 지론은 '제대로'와 '한 만큼'이다. 그가 말하는 '한 만큼'은 법정 스님이 말한 '될 대로'와 비슷한 뜻이다. "제대로 하지 않고, 자신이 한 것보다 많이 바라기 때문에 정치·사회적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현실은 두 종교인이 말한 '될 대로'와 '한 만큼'의 결과이다. 수많은 사람의 충고와 건의를 무시한 불통의 씨앗, 대통령이 비선(�線)에게 국정을 '코치'받고 상의했다는 씨앗, 사건이 들통난 후에도 시원하게 털어놓지 않고 이런저런 핑계와 떠넘기기를 거듭한 씨앗들이 지금 우후죽순처럼 발아(發芽)하고 있다. 제대로 하지 않고, 한 만큼이 아니라 한 것보다 더 바라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다. 그 결과는 매 주말 촛불시위 참가자 수를 경신하는 열매로 나타나고 있다. 이젠 호미로도 가래로도 막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법정 스님은 "스님을 믿지 말라"고도 했다. "스님은 절에서 한때 머물다 가지만, 신도들은 대를 이어 이 도량을 지키고 보살펴야 합니다." 이 말에서 스님을 정권·대통령, 신도를 국민, 도량을 대한민국으로 바꿔 읽으면 바로 우리 현실이 될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자기 자신을 등불 삼고, 진리를 등불 삼으라(自燈明 法燈明)"는 부처님 최후의 당부도 강조하곤 했다. '주인 의식'이다.

지금도 우리는 매 순간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씨앗을 뿌리고 있다. 그 씨앗이 어떤 열매로 돌아올지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지난달 동안거(冬安居) 석 달간의 집중 수행을 시작하는 결제 법회에서 한 조실 스님은 현 시국에 대해 일갈(一喝)하려다 삼켰다고 한다. 그가 원래 하려던 법문 한마디는 "속지 말자, 이 꼴 난다"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