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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트렌드vs클래식]어느 시골 의원 이야기

바람아님 2016. 12. 7. 23:36
경향신문 2016.10.26 21:23


지난 추석 연휴 전날이었다. 우리는 ‘영악’하게도 바라는 것도 없이 열심히 일해주는 시댁 식구들의 노동력을 거저 확보하자는 욕심에, “연휴 동안 놀면 뭐하냐”며 “보람차게 다 같이 마당에 잔디나 깔아보자”며 부부가 함께 잔디를 사러 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횡단보도 앞에서 한 노인이 유령처럼 나타나 자동차 뒷문 손잡이를 잡고 매달렸다. 태워달라고. 그 모습이 하도 절박해 보여서 그냥 태워드렸다. 어디까지 가시는지 묻지도 않고….


“미안해. 염치 불고하고 무작정 태워달라고 해서…. 너무 아파서 그랬어. 그러니까 너그럽게 좀 용서해줘요. 그냥 딱 죽고 싶을 정도로 아픈데 내일 자식들이 온다잖아. 자식들 앞에서 아프다고 울 수도 없고. 그래서 연휴 닥치기 전에 병원 가서 주사라도 한 대 맞고 물리치료라도 좀 받으려고. 그러니까 나 대화면의 병원 앞까지만 태워줘. 염치 불고하구지만….”


“염치라니요? 당연히 태워드려야죠. 근데 많이 아프세요?”

“안 아픈 데가 없어. 그냥 온몸이 다 잘못된 것 같아. 젊어서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인대가 늘어나고, 뼈가 다 닳았대. 수술도 못하고 치료약도 없대. 그냥 이렇게 아프다 죽는 수밖에 없다는데 그 고통을 누구한테 말해. 자식들한테? 말도 안되지. 니들 키운다 이리 됐다 할 수도 없고. 그냥 마누라 하고 나누는 거지. 그 고통…. 그러니까 젊은이도 젊다고 일을 너무 많이 하면 안돼. 죽어라 일만 하면 늙어서 후회해. 그건 대체로 아무 소용없는 후회고.”


남의 아버지이지만 내 가슴도 아픈 얘기였다. 병원 앞에서 힘없이 손을 흔들며 고맙다고, 고맙다고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던 노인의 모습이 얼마나 처연하게 선량해 보이던지 살짝 눈물도 났다. 아파서 그런 건지, 아니면 고마워서 그런 건지 그 순간 노인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는데, 그 눈물을 보는 순간 알았다. 지금 내 인생의 잊을 수 없는 찰나 중 하나가 지나가고 있음을 ….

그 노인이 갔을 법한 시골 의원 대기실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칠순에 절정의 행복을 느낀다고 썼던’ 내 어머니가 지금 많이 아프시다. 몇 년 전 수술한 허리를 삐끗 다친 후 처음엔 119에 실려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겨졌고 그 다음은 시 외곽의 종합병원에서 열흘을 지내셨는데 갈 때마다 엄마는 이런 하소연을 하셨다.


“대학병원이고 종합병원이고 다 필요 없다. 의사 진료고 물리치료고 우리의원 찜질팩 하나만도 못해. 나 퇴원해서 우리의원 다닐란다.”

우리의원은 횡성군 안흥면에 있는 국민건강보험 소속의 작은 시골 의원이다. 자식들을 위해 지나치게 과로했던 시골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아플 때 찾아가 늙고 병든 몸을 무작정 내맡기는 곳. 무엇보다 성심으로 아픔 몸들을 어루만져주며 환자에게 이것저것 묻고 경청해 주고 사적인 고통을 알아주는 젊은 물리치료사가 있어서 우리 어머니는 세상의 다른 어떤 병원보다 이곳을 사랑하신다.

“여기 오면 일단 마음이 치료돼. 놀라고 주눅 들고 서러운 늙은 병자의 마음을 얼마나 다정하게 데워주는지 모른다. 장갑도 안 끼고 맨손으로 구석구석 아픈 몸을 마사지해 주는 젊은 치료사 손길에서 자식들에게 받은 상처와 무관심을 보상받는 기분마저 든다면 너 이해하겠니?”


이해할 것 같다. 이해할뿐더러 아픈 내 어머니를 보살펴주는 ‘천사의 손길’을 느낀다. 존 버거의 어느 시골 의사 이야기 <행운아>를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책의 주인공이 따로 없구나 생각했다. 그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취급받을 것으로 예상한다.”


존 버거의 글에 내 어머니가 덧붙였다. “맞다. 종합병원에서 느낀 내 불행감에 딱 걸맞은 얘기로구나. 그런데도 돈은 얼마나 뜯어가든지…. 그에 비해 일부러 고향으로 돌아온 이 젊은 물리치료사는 얼마나 훌륭하냐? 그 선생에게 어린아이처럼 몸을 맡기고 싶은 환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소홀함이 없더구나. 내 몸이 느끼는 소홀함 말이다.”

한편 또 놀라운 건 그렇게 훌륭한 성심의 의료서비스를 받고 우리 모녀가 지불한 치료비가 2200원이라는 사실. 처음이었다. 아프지 않아 병원 갈 일이 거의 없었던 내가 그간 수천만원대의 건강보험료를 떼어간 국가라는 ‘약탈자’를 처음으로 대견하게 느낀 건.


당연히 의료민영화는 안된다. 의료가 민영화되면 늙고 병든 내 어머니 아버지의 몸 하나하나가 돈벌이로 환원되고 만다. ‘천사’가 상주하는 시골 의원은 다 사라지고 만다는 얘기다. 공공병원 성과연봉제도 마찬가지다. 의료민영화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국가가 국민의 아픈 몸을 돈벌이로 치환시키려 한다면, 지금껏 건강한 몸으로 군소리 없이 건강보험료를 낸 국민 모두가 국가를 대상으로 소송을 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경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