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영어 면접 준비를 위해 다니던 어학원의 영국인 강사가 나에게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웃기는 이야기라고는 정말이지 단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는 거다. 그날 신문에서 틀림없이 뭔가 유머 비슷한 것을 읽은 것 같은데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잠시 보고 있던 강사는 저런 요구를 들었을 때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도 생각해 내지 못한다면 면접관이 나를 너무 심각한 사람으로 볼 거라고 했다. 유머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 하지만 사실은 그보다는 나는 지쳐 있는 사람이었던 거다. 웃기는 이야기가 저절로 떠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걸 기억해서 이야기하기에도 너무나 지치고 피곤한 사람.
서로를 늘 보다시피 한국 사람들은 매우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 심지어는 화난 것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저렇게 다들 딱딱한 얼굴들을 하고 있는 와중에 영국식으로 미소를 띠고 눈인사라도 하면 이건 약간 정신이 멀쩡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이겠구나 싶을 정도다. 모르는 사람과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 같은 것은 더구나 찾아보기 어렵다. 서로 할 말만 하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하물며 발을 밟거나 부딪쳤을 때 미안하다거나, 문을 잡아 주거나 자리를 양보했을 때 고맙다거나 하는 등 꼭 해야만 할 것 같은 말도 하지 않으니 말해 무엇하겠나.
나는 이 역시 서울의 사람들이 지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입도 떼기 싫을 정도로 지쳐 있는 게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미처 내리기도 전에 더구나 옆 사람들을 밀치며 뛰어 들어가 잽싸게 자리를 차지하고 잠을 자 버리는 지하철 풍경이 있을 수 있겠는가. 길기로 유명한 한국의 노동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2위며 게다가 통근 시간의 경우 OECD 국가 26곳 평균의 2배가 넘는다. 몸과 마음이 지치는 것도 당연하다.
지난 연말 크리스마스 휴가 때 잠시 서울에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는데 한 역에서 누군가 때문에 지하철 문을 닫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다른 역보다 오래 정차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거 내리세요!” 하는 긴박한 안내방송이 들렸다. 또다시 “내리세요!” 하는 외침이 들리더니 지하철 문이 닫힘과 동시에 “저걸 콱 그냥…” 하고 말하는 소리가 아무런 여과 없이 지하철 내에 울려퍼졌다. 얼결에 험한 언사를 듣고 말았다. ‘저걸’ 콱 그냥 어쩌겠다는 말인지. 그러나 사고가 발생하거나 운행 지연이 되는 경우 기관사가 겪을 고생을 생각해 보면 이런 상황에서 여유 있는 태도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유머는 언감생심이고 말이다.
그래도 영국에서라면 저 상황에서 썰렁한 유머를 하나 구사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차 출발해야 하니까 산타한테 태워 달라고 하라거나 하는 식의 농담. 생각해 보면 영국도 몇 년 사이에 매우 분위기가 삭막해졌다. 모르는 사이에 당연히 던지는 아침 인사나 마치 아는 사이처럼 농담 섞은 수다를 한참 떨다가 각자 갈 길 가는 풍경들이 그리 썩 흔한 것은 아니게 되었다. 여기고 저기고 다들 점점 고되어 가는 일상뿐 아니라 넘쳐나는 온갖 좋지 않은 뉴스 때문에도 지쳐 가는 것이리라.
하지만 힘든 때일수록 일상 속 작은 웃음은 큰 힘이 될 수 있다. 주위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스스로에게도 말이다. 시스템이 당장 바뀔 것을 기대할 수 없으니 더 그렇다. 평생 온갖 고난을 다 겪은 간디는 “유머 감각이 없었더라면 나는 진작 자살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새해 인사로 가벼운 유머를 해 보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남들의 유머에 친절히 웃어 주기만 해도 좋을 것이다.
약력
서울대 소비자아동학과 졸업, 사법시험 44회, 영국 칼리지 오브 로(College of Law) 법학석사(LL.M), 런던 GRM Law 변호사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