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 수많은 인물이 영의정을 거쳐 갔지만 많은 사람들은 영의정의 대명사로 황희(黃喜, 1363~1452년)를 기억한다. 황희는 약 20년 가까이 영의정 자리에 있었고 87세에도 영의정을 지낸 ‘영원한 영의정’이었다. 황희가 최장 기간 영의정을 지내고, 최고령 영의정 기록까지 세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세종 시대의 명재상으로 인식되는 황희는 고려 후기에 태어나 태조, 태종, 세종 시대까지 관료로 활약했다. 세종 시대 그의 정치 이력의 대부분을 장식한 것은 영의정이다. 90세까지 살면서 24년간 정승 자리에 있었고, 이 중 19년을 영의정으로 살았다.
황희는 1363년(고려 공민왕 12년) 강릉부사 황군서의 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본관은 장수(長水)다. 고려 후기인 1389년(공양왕 1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 성균관 학록에 제수됐으나,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조선 건국 후 조정의 요청으로 관직에 진출해 태조대 성균관 학관·감찰 등 하위직을 역임한 황희는 태종의 신임 속에 관료로서 순탄한 길을 걸었다.
“기밀사무(機密事務)를 오로지 다하고 있으니, 비록 하루 이틀 동안이라도 왕을 뵙지 않는다면 반드시 불러서 뵙도록 했다.”
태종실록 기록을 보면 황희가 태종으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황희는 1409년 형조판서와 대사헌,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 등을 지내면서 태종을 보좌했다.
태종대 승승장구하던 황희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은 1418년 태종이 세자인 양녕대군의 폐출을 결정하면서다. 태종은 장자 양녕대군이 11세가 되던 1404년에 세자로 책봉했지만 둘은 계속 갈등을 빚었다. 학문을 게을리하고 궁중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는 등 양녕대군이 군주로서 자질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후의 세종)을 세자로 지명했다.
이 과정에서 태종의 의중을 알아차린 신하 대부분이 찬성했지만 황희는 “세자가 나이가 어려서 그렇게 된 것이니, 큰 과실은 아니다”라며 반대했다. 장자를 세자로 삼은 원칙이 무너지면 후대에도 유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양녕대군 폐위 후 황희는 태종의 분노를 사서 서인(庶人)으로 폐해졌다가, 교하로 유배됐다. 다시는 서울 근처에 두지 말라는 태종의 지시로 황희는 본관과 가까운 남원으로 옮겨졌다.
유배의 길을 걷던 황희가 다시 관직에 등용된 것은 세종 때인 1422년 2월이다. 역설적으로 세종에게 황희를 추천했던 인물은 다름 아닌 태종. 그만큼 태종은 황희를 신임했다.
다만 세종 입장에서 보면 황희는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조정 신하들 또한 황희의 등용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세종은 황희의 행동이 “충성스럽지 않다고 볼 수 없다”며 반대파들 견해를 일축했다. 세종의 신임을 받은 황희는 1426년 우의정에 이어 1427년 좌의정이 됐다.
‘훌륭한 재상’으로만 알려진 황희지만 사실 몇 차례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된 적도 있다. 1427년 사위 서달이 아전을 구타해 죽인 사건이 일어나자 황희는 동료 정승 맹사성에게 사건의 무마를 부탁했다. 결국 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황희는 파직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1430년에는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의 일에 개입했다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됐다. 또 청백리 정승으로 이름이 높지만 실제로는 한때 매관매직과 뇌물 수수 사건에 연루돼 곤욕을 치르는 등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1431년 69세 나이로 복직한 황희는 결국 영의정에 올랐다. 이후 황희는 고령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세종은 늘 그를 곁에 뒀다.
황희의 거듭된 사직에 세종은 “경의 자신을 위한 모계(謀計)는 좋으나, 나의 의중(倚重)은 어찌하려는 것인가”라는 논리로 황희를 무마시켰다. 자신의 곁을 지켜주기에 꼭 필요한 인물임을 강조한 것이다. 황희가 더 나이가 들자, 세종은 초하루와 보름에만 조회를 하도록 특전을 베풀었고, 큰일 이외에 황희를 번거롭게 하지 말도록 명했다. 집에 누워서 대사(大事)를 처리해도 좋다는 지침까지 내렸다.
세종의 파격적인 대우 속에 황희는 87세로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할 때까지 신하로서는 최고의 자리를 지켰다.
“큰일을 의논할 적엔 의심나는 것을 고찰함이 실로 시귀(蓍龜·점을 치는 데 쓰는 상서로운 풀과 거북)와 같았으며, 좋은 꾀와 좋은 계획이 있을 때엔 임금에게 고함이 항상 약석(藥石·약과 침)보다 먼저 했다. 임금을 과실이 없는 처지에 있기를 기필(期必)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요란하게 하지 않는 것으로 목적을 삼았다.”
실록 평가를 보면 세종이 고령의 황희를 끝까지 신임한 이유를 알 수 있다.
1449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황희는 세종과 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국가 원로로서 정치에 많은 도움을 줬다. 황희는 세종 시대 4군 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하고 감독했다. 특히 세종이 중년 이후 새로운 제도를 많이 제정하자, 황희는 “조종(祖宗)의 예전 제도를 경솔히 변경할 수 없다”며 반박하기도 했다. 왕의 일방적인 독주에 제동을 거는 악역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종과 황희는 여러 차례 의견 충돌을 빚었지만 세종은 황희를 늘 중용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갔다. 명재상 황희의 탄생에는 소통하고 포용하는 세종의 리더십이 있었던 셈이다.
황희가 치사하던 날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황희는 재상 자리에 있던 20여년간에 의견이 너그럽고 후한 데다가 분경(紛競·인사 청탁)을 좋아하지 않고, 나라 사람의 여론을 잘 진정(鎭定)하니, 당시 사람들이 진정한 재상이라 불렀다.”
황희는 고령의 나이에도 건강을 유지했기 때문에 말년에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시력을 보호하기 위해 한쪽 눈을 번갈아 감는 등 자신만의 건강 비결을 지켜나간 점은 흥미롭다.
물론 황희가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부분도 있다.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해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다는 지적을 받은 게 대표적이다. 세종 역시 황희가 수신제가에는 일부 문제점이 있다는 점을 인식했지만 치국과 평천하에는 황희를 최적의 인물로 보고 변함없는 신뢰를 보냈다. 실록에 황희의 의견을 수용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오는 것도 이런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황희에 관한 일화 중 어느 농부가 소의 약점을 말하면서 황희의 귀에 속삭이듯 말하는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미물도 자신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깨달은 황희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다 들어줬다는 것이다. 이 일화로 인해 황희를 모든 의견을 수용하는 부드러운 모습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실제 황희는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태종이나 최고의 성군 세종 앞에서도 황희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주저하지 않았다. 황희에게는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장점이 훨씬 더 많았고, 세종은 참모로서 황희의 이런 능력을 잘 활용했다. 황희는 창업에서 수성으로 나아가는 태종과 세종 시기에 참모로서 제 역할을 했고, 부드러우면서도 할 말은 다했기 때문에 명재상으로 남았다. 특히 오랜 국정 경험을 통해 정치적으로 균형 감각을 보유했다는 점은 그의 최대 장점이었다.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황희지만 갈매기를 벗하며 사는 소박한 삶을 희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가 그를 필요로 했고, 황희는 90세에 이르도록 정승으로 활약하면서 조선 초기 정치와 문물의 기틀을 잡는 데 기여했다. 아흔 줄에 이르러서도 건강을 유지한 것은 영원한 현역 정승의 필요조건이었다. 황희는 때로는 조용하게 왕을 보좌하면서도 필요한 경우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늘 정치의 핵심을 확실히 파악하고, 균형 감각을 모범 답안으로 내세우며 이를 실천한 재상이었다.
대통령 탄핵으로 정국이 혼란하고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사례가 쏙쏙 드러나면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황희와 같은 재상이 출현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 마련될 것을 기대해본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95호 (2017.02.15~02.2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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