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숨은 역사 2cm] 조선 여론조사 갤럽보다 505년 앞섰다

바람아님 2017. 2. 21. 23:58
연합뉴스 2017.02.21 16:20

대통령선거 해를 맞아 여론조사가 왕성해지고 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발표되는 조사 결과에 정치권의 희비가 엇갈린다.

여론조사는 유권자 표심을 점검하고 후보별 선거 전략을 짜는 데 활용됨으로써 민주주의 발전과 공익 증진에 기여한다.

유권자 환경과 요구, 연령 등을 반영해서 맞춤형 홍보메시지를 작성할 때도 여론조사는 필수다.

사회구성원의 이해관계가 워낙 복잡하고 속내를 숨기려는 성향 탓에 조사가 왜곡되기도 한다.

조사기관이 난립한 것도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지난해 4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격 미달 업체가 부실 결과를 내놓은 탓에 민의 파악에 혼선을 빚었다.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도 부정확한 분석으로 몸살을 앓는다

세계 최대 여론조사 기관으로 1935년 설립 이후 줄곧 정상의 권위를 자랑한 갤럽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을 예측하지 못해 망신을 당했다.


여론조사는 표본 추출이나 분석 기법 등에서 우리가 서유럽이나 미국보다 뒤지지만 시작은 수백년이나 앞선다.

조선에서는 세종 집권기인 1430년에 처음으로 전국 여론조사를 했다.

조세제도인 손실답험법을 대폭 손질하고서 백성의 뜻을 물으려는 조처였다.

손실담험법은 풍년이나 흉년이 들면 중앙관리가 논과 밭에 나가 수확량을 직접 조사하고서 세율을 직접 매기는 방식인데 비리와 차별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세종은 부작용을 개선한 뒤 전국 17만여 가구를 방문해 찬반 의견을 묻도록 했다.

중앙관리부터 지방 관찰사와 수령, 향리, 농민까지 망라한 조사는 5개월간 진행됐다.

여론은 지역별로 확연히 달랐다.


땅이 비옥한 전라도와 경상도는 찬성률이 99.4%였고, 척박한 평안도와 함경도는 반대표가 99.8%나 나왔다.

찬성률이 절반을 넘었는데도 개혁안은 시행되지 않았다. 다수결로 단순히 밀어붙일 일이 아니라고 세종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보완과정을 거쳐 찬성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먼저 시행하고 다른 지역으로 점차 확대했다.


전국에 통용된 세법은 토지를 비옥도별로 6등급, 풍작 정도별로 9등급으로 각각 나눠 차등 세율을 정하도록 했다.

이 제도가 완성되는 데 무려 14년이나 걸렸다. 백성의 이해관계를 낱낱이 따져 불만을 최소화하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세종의 이런 애민사상은 근대 민주주의를 잉태한 프랑스를 훨씬 능가했다.


프랑스에서는 1337년 영국과 시작한 전쟁이 계속됐다. 백년전쟁으로 불리는 이 싸움의 원인은 왕위계승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귀족층의 이권다툼이었다.

1453년까지 지속한 백년전쟁으로 역병과 기근이 만연하고 도적 떼가 들끓어 프랑스는 생지옥으로 변했다.


열 아홉살에 화형을 당해 죽은 백년전쟁 영웅 잔 다르크

백년전쟁의 영웅 소녀 잔 다르크는 1431년 열아홉 살의 나이로 화형을 당해 죽었다.

지배층의 땅따먹기 싸움 탓에 무고한 민중은 116년간 피를 흘려야만 했다.

세종이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라는 철학과 신념을 몸소 실천하던 시절 프랑스에서는 '여론'이라는 용어조차 없었다.

이 말은 300여년 뒤 계몽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처음 사용했다.

루소는 "여론이야말로 세계 최고 여왕으로 국왕 권력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국왕은 되레 여왕에게 시중을 들어야 하는 노예다"라고 설파했다.


표본으로 전체 민심을 측정하는 근대 여론조사는 1824년 미국에서 처음 이뤄졌다. 존 퀸시 애덤스와 앤드루 잭슨이 격돌한 대통령선거에서다.

이후 여론조사는 학문과 과학 발전 등에 힘입어 급성장했고, 지금은 민주정치의 일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