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선조는 이순신 시험하려 戰功 올린 그를 오히려 징계해
오직 나라 지킬 뿐인 충무공, 좌천 조치에 분노하지 않고
최선 다한 복무로 큰 그릇 입증.. 大義 따르는 자세에 임금 감복
여진족 우을기내 생포 사건의 마무리는 실로 희한했다. 선조는 관련자들이 모두 경악할 처리를 했다. 큰 전공에 걸맞은 큰 포상은커녕 오히려 처벌을 단행해, 작전을 이끈 이순신을 무관 최하위 벼슬인 종9품인 건원보 권관으로 좌천시켰다. 처벌 사유로 선조가 내세운 명분은 '북병사 김우서 장계(狀啓)'였다.
우을기내의 목을 올려 보낸 김우서는 급히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서 군관들이 그처럼 큰 사건을 준비하고 실행하면서도 육진의 최고 지휘관인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아서 명령 체계를 무너뜨린 불법성을 지적하면서 포상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이순신 '행록'). 사실 이순신은 거사를 극비로 진행했다. 정보가 밖으로 새나가면 성공은커녕 이쪽의 희생만 불러올 만큼 위험한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이순신을 처벌하면서 자신이 '의롭지 않은 작전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확실하게 보여줬다고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조는 단순한 사람은 아니었다. 훗날 선조가 보인 행태를 종합 분석해 보면, 당시 그는 군주로서 '이순신이 과연 어떤 무장인가?' 제대로 파악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매우 큰 전공을 세운 이순신을 포상이 아닌 처벌로 처리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영악한 계산'을 하는 선조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의문이자 일종의 시험이었다.
이순신은 묵묵히 좌천 조치에 따랐다. '행록'에 따르면 그가 '건원보 권관'이 된 시기는 '그해 10월'(선조 16년·1583년)이라고 한다. 생포 작전 성공 넉 달 만에 처벌이 시행된 것이다. 좌천당하기 직전 이순신의 신분은 남병사 소속 군관이었다. 당시 군관으로서의 그의 품계는 해당 자료가 없어서 구체적으로 특정하기 곤란하다. 다만 관행상 대개 6품 내지 7품 직에 해당했다. 따라서 그는 이때 5 내지 7단계의 품계 아래 직급으로 대폭 좌천당한 것이다.
이런 부당한 처분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충분히 있었다. 당시 벼슬아치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벼슬자리에서 물러날 때 흔히 쓰는 수법이었던 칭병(稱病)을 하거나 노부모 봉양 등의 이유를 내세워 물러가는 것이다. 이순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발령 조치를 통고받은 뒤 곧 건원보 권관으로 부임해 충실하고 의연하게 근무했다.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처신했던 걸까? 우을기내 사건 자체는 물론 훗날 명량대첩 등의 사례를 통해서 명백하게 증명된 것이지만, 이순신은 '국토 방위'라는 '대의'를 생각할 때 작은 지역이든 큰 지역이든 간에 자신이 몸소 나서거나 국경의 한 부분을 지키는 것이 다른 자들이 하는 것보다 바람직하다고 확신했다. 그런 마음가짐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매우 큰 자부심과 소명의식 없인 불가능하고, 이는 그가 지닌 큰 지도자로서의 높은 역량과 격조를 웅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선조가 암묵적으로 시도한 시험을 이순신이 매우 뛰어나게 통과한 것이 되었다. 영악한 선조 자신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터였기 때문이다. 일이 그렇게 되면 절로 입장이 바뀐다. 선조가 이순신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 이순신이 선조를 시험한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시험에서 선조는 참패했다. 뒤늦게 선조도 그걸 깨달았다. 대의에 입각해 의연하고 당당하고 과감하게 처신하는 당찬 인물 앞에 서면, 불현듯 밝은 거울 앞에 선 듯 자신의 약삭빠르고 이해관계에 예민한 졸렬한 모습이 환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선조는 이를 명확히 인식하고 열패감을 느낄 정도의 지적 능력과 감각만은 충분한 사람이었다.
평생토록 자신은 매우 영민하고 지혜가 많은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살았던 선조가 신하의 강한 인격과 뛰어난 능력과 담대한 행동양식에 눌려 기가 꺾였던 사례는 오직 두 사람, 이율곡과 이순신의 경우뿐이었다. 그게 모두 니탕개의 난을 계기로 수면 위로 떠올랐던 것이 신기한 인연이다. 당시 병조판서로서 비변사 실세였던 이율곡은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그리고 온갖 비방과 매서운 곤욕이 닥칠 것을 환히 알면서도 서얼 허통, 천인 면천 정책으로 국난 극복의 토대를 놓았다. 그리고 대전란 발발로 육진에 파견된 진압군의 일개 군관 이순신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적의 괴수를 처치할 작전을 세우고 성공해 니탕개의 난 종식의 큰 틀을 세웠다. 그런 것은 모두 '개인의 안위'보다 '나라 전체의 안위'를 생각할 때만 비로소 가능한 행위였다. 선조도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게다가 포상 대신 부과한 처벌까지 의연하게 받아들인 이순신의 당당함을 대하면서 절로 기가 꺾인 선조는 이때부터 '이순신'이라면 매사 한 수 접고 들어갔다. 이후 선조가 이순신에게 부여한 특혜들은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다. 군신 간에 특수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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