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동아일보 2002-05-02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대은암동은 지금 청와대가 들어서 있는 서울 종로구 세종로 산 1번지 북악산 남쪽 기슭을 일컫는 동네 이름이었다. 여기를 대은암동이라 부른 것은 조선 중종(1506∼1544) 때쯤부터라고 한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1431∼1492)의 제자로 글재주가 뛰어났던 지정 남곤(止亭 南袞, 1471∼1527)이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집을 짓고 살면서 대은암이란 바위 이름이 생겨났다.
남곤이 당대를 대표할 만한 풍류문사였기에 그와 짝할 만한 문사인 읍취헌 박은(씭翠軒 朴誾, 1479∼1504)과 용재 이행(容齋 李荇, 1478∼1534) 등은 늘 술을 들고 남곤의 집에 찾아가곤 했다. 그러나 승지 벼슬을 지내던 남곤이 새벽에 나갔다 밤에 돌아오니 만나서 함께 놀 수가 없었다. 이에 박은이 그 집 뒤에 있는 바위를 만날 수 없는 주인에 빗대 대은암(大隱岩·크게 숨어있는 바위)이라 하고, 그 밑을 흐르는 시내를 만리 밖에 있는 여울과 같다는 뜻으로 만리뢰(萬里瀨)라고 했다.
이후 이 일대를 대은암이 있는 동네라 하여 대은암동이라 했는데 불행하게도 뒷날 남곤이 기묘사화(1519)를 일으켜 죄인이 되자 남곤의 후손은 이 집을 지킬 수 없게 됐다. 집주인이 바뀌다 드디어 율곡의 친한 벗인 백록 신응시(白麓 辛應時, 532∼1585)의 소유가 됐다.
이 동네에 남곤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우의정을 지낸 안당(安塘, 1460∼1521)과 율곡학파 중추가문 중 하나인 임천 조씨(林川 趙氏) 일가 등도 대은암동에 터를 잡았다.
특히 안당의 집터는 대은암동 중 가장 명당이라서 현인(賢人)이 태어날 곳으로 꼽혔는데 그 집 종의 아들로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 1534∼1599)이 태어난다. 그는 종의 신분을 타고났으면서도 학문을 대성하여 율곡의 벗이 되고 율곡학파를 성립하는 데 막후 실력자로 큰 역할을 한다. 이를 두고 명당터를 잘못 짚어 마땅히 내당이 자리할 곳에 행랑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런 집터들이 지금은 모두 청와대 안에 포함돼 있다.
그림에서 보는 집은 남곤이 처음 터를 마련하고 백록 신응시(白麓 辛應時)가 사들여 살기 시작한 백록의 옛집일 것이다.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릴 때는 백록의 6대손인 서포 신치복(西圃 辛致復·1680∼1754)이 살고 있었다. 물론 겸재의 동네 친구였다. 그래서 겸재는 유서깊은 백록의 대은암 옛집을 장동팔경(壯洞八景)의 하나로 즐겨 그리게 됐다. 이 그림은 그 중의 대표작이다. 초당(草堂) 뒤 산언덕에 솟아난 바위가 대은암이다. 여기에는 ‘대은암무릉폭(大隱岩武陵瀑)’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지 누군가 확인해주면 좋겠다.
(참고- 큰이미지와 장동팔경첩 중 대은암(大隱岩)-국립중앙박물관소장)
정선-장동팔경첩-대은암(大隱岩)-국립중앙박물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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