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동아일보 2002.05.23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현재 워커힐호텔과 워커힐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는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 일대의 모습이다. 이 곳에 한강을 건너는 가장 큰 나루 중 하나인 광나루가 있었다.
광나루가 언제부터 이 곳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의정부 동두천 쪽에서 내려와 한강을 건너 광주 여주 충주 원주로 가려면 이 나루를 건너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니 우리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이 나루도 함께 생겨났을 듯하다.
더구나 이 나루 건너편이 백제의 옛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풍납토성임에랴!
요즘 학계에서는 그 토성을 발굴하여 그 곳이 하남위례성인지 여부를 밝히려는 노력이 한창 진행중이다. 이 곳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었다면백제시조 온조(溫祚·서기전 18∼서기 27)왕이 백제를 건국하면서부터 이 광나루는 한강나루 중 가장 큰 나루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큰 나루 또는 너른 나루라는 뜻으로 광나루라 부르지 않았나 한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 개로왕 21년(475)에 고구려 장수왕(413∼491)이 하남위례성을 함락하여 백제가 도읍을 공주로 옮겨간 뒤에도 이 나루 이름만은 그대로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물론 광주(廣州)라는 지명도 백제 때 수도가 있던 큰 고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에 광주로 건너가는 나루라는 뜻도 겸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가 한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이 광나루의 기능은 되살아나게 되었으니 광주를 거쳐 충청좌도(左道·남쪽을 바라보고 앉는 임금을 기준으로 할 때 좌도라는 의미로 지도상에서는 동쪽 부분임)와 강원도 경상도를잇는 교통의 요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에 아차산과 한강이 어우러지는 아리따운 경치와 함께 이 곳은 별장지대로 각광을 받게 되어 권문세가들이 다투어 아차산 기슭에 별장을 지었다.
특히 겸재가 살던 진경시대는 평화와 안락이 절정에 이르러 상류층들이이런 아취있는 풍류생활을 맘껏 누리고 있었다. 겸재는 그런 그 시대 상황을 이 광나루 진경에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배를 타고 보거나 천호동 쪽에서 바라다보면 아차산의 층진 모습이 꼭 이와 같이 보인다. 다만 이 그림에서처럼 한식 기와집들이 드문드문 숲속에 배치되는 운치가 사라지고 살벌한 현대식 고층건물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차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산 아래 나루터에는 두어 척 나룻배가 묶여있는데 강 한가운데로는 돛단배들이 쉴 새없이 오르내린다. 그 안에는 갓 쓰고 도포 입은 선비들이 가득 타고 있으니 아마 여행이나 풍류를 즐기는 유람선인 모양이다.
지금 이 곳에는 천호대교(千戶大橋)가 지나고 있다. 천호대교는 1974년8월에 착공하여 1976년 7월에 준공하였다.
그 위로 차량 행렬이 하루 종일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니 나룻배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겸재시대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하겠다.
어디 그뿐이랴!
다시 지하철 5호선이 이 곳 광나루를 가로질러 지나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그림은 영조 17년(1741) 비단에 채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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