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동아일보 2009-09-18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조선 태조(1392∼1398)는 즉위 3년째인 1394년 8월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고 9월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다음해 9월 궁궐 신축을 마무리짓는다.
이어 다음달인 윤 9월에는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설치하고 한양성을 쌓기 시작한다. 이 역시 만 1년 만인 태조 5년(1396) 9월 완공되는데 한양의 진산(鎭山·명당의 뒷산)인 북악산에서 내청룡(內靑龍)에 해당하는 낙산(駱山), 안산(案山·명당의 앞산)인 남산, 내백호(內白虎)인 인왕산의 능선을 타고 이어지는 석성(石城)으로 둘레가 9975보(1만8136m)이고 높이가 40척2촌(약 12.2m)이었다.
이렇게 한양을 석성으로 둘러싸 놓았으니 통행문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방에 4대문을, 그 사이 간방에 4소문을 냈다. 4대문 중 정북문을 숙청문(肅淸門), 정동문을 흥인문(興仁門), 정남문을 숭례문(崇禮門), 정서문을 돈의문(敦義門)이라 했다. 또 4소문 중 동북문을 홍화문(弘化門), 동남문을 광희문(光熙門), 서남문을 소덕문(昭德門), 서북문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이 가운데 홍화문을 동소문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문으로는 동북지역 관민들과 여진족들이 주로 드나들었다. 그런데 성종이 14년(1483) 창경궁을 짓고 그 동문을 홍화문이라 불러 동소문과 혼란을 일으키자 중종 6년(1511) 동소문의 이름을 혜화문(惠化門)으로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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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 혜화문은 문루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나서는 한동안 문루가 없는 암문(暗門) 형태의 ‘무지개 문’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도 문루의 표현이 없다.
영조 20년(1744) 8월 어영청(御營廳·인조 이후 서울 도성의 수비를 맡던 군영)이 왕명을 받들어 이 곳에 문루를 재건한다. 불탄 지 152년 만의 일이고 겸재 나이 69세 때였다.
겸재는 문루가 없던 때의 동소문 일대 진경을 남기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던 모양인데 기법으로 보면 70대 후반의 특징이 보이니 옛 기억을 되살리거나 이미 그렸던 옛 그림을 보기 삼아 다시 그린 그림일 수 있다.
영조때 지어진 동소문 문루는 일제가 방치하여 1928년 허물어지고 만다. 그래서 그림에서 보이는 무지개 문만 남아 있었다. 일제는 1939년 경성부 확장이라는 명분 아래 서울의 청룡줄기인 동소문 고개를 자르고 새 도로를 내는 만행을 저지르는데 이때 그림 속 동소문의 모습은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높다랗게 능선을 따라 쌓은 성 안쪽 왕솔 우거진 산봉우리는 지금 가톨릭대가 들어선 혜화동 1번지 일대다. 본래 이 동네는 성 아랫동네라는 의미로 순 우리말로 잣동이라 했기 때문에 한자로 백동(栢洞)이나 백자동(栢子洞)으로 표기돼 왔으나 1914년 동명 통폐합시 혜화동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구름이 휘감아도는 산밑 동네가 대학로 일대라면 믿어지겠는가. 지금 동소문 고개에 가보면 1994년 10월 서울 도성 복원사업의 하나로 복원해 놓은 혜화문 문루가 있다.
도로로 절단된 성벽 끝에 지어놓았는데 이왕이면 낙산줄기를 다시 잇고 그 위에 세우면 좋겠다. 절단된 산 높이가 20m는 훨씬 넘어보이니 그 위로 연결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듯하다.
(참고- 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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