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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혜의 수요 역사탐구] 옥포의 첫 승리.. 조선인 마음에 抗戰의 용기 심다

바람아님 2017. 4. 27. 07:37
조선일보 2017.04.26. 03:12

[이순신 리더십] [17]
强한 자는 역경 때 빛나는 법
왜군에 놀란 조선 벼슬아치들, 적 피해 임지에서 달아났지만
이순신은 반대로 戰場에 달려가 옥포해전 첫 싸움서 승리하며
'이길 수 있다' 자신감 심어
송우혜 소설가

역경에 처했을 때 오히려 더 빛나는 이들이 있다. 진정한 강자들이다. 이순신의 뛰어남을 눈부시게 드러낸 것 역시 극심한 역경이었다. 부산진에서 임진왜란의 첫 전투가 벌어졌던 4월 14일 이래 남해안의 조선 수군은 날로 악화되는 상황에 시달렸다. 경상좌수영이 4월 15일에 전투 없이 무너지고 경상우수영도 4월 28일에 무너졌다.


전쟁 발발과 동시에 일본 침공군이 경상좌도 바다를 완전히 장악하자 조정에서는 다급하게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명령했다. "경상우수사 원균과 힘을 합쳐 적선을 쳐부수라!" 이에 이순신은 원균과 합동 작전으로 일본군을 칠 계획을 세웠다. 낯선 경상도 바다에서 싸우려면 물길과 지형 등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경상도 수군의 안내와 합동 작전이 필수였다. 일본군 전함이 500척에 달했기에 아군 전력도 최대한 동원해서 전라우수영 수군까지 합세해 토벌 작전을 실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돌연 막중한 차질이 생겼다. 4월 28일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일본군 대함대가 경상우수영 쪽으로 오고 있다고 오해해 황급히 경상우수영 함선들을 바다에 가라앉히고 관고(官庫)를 불태우고 수군을 해산해 경상우수영 자체가 사라졌다. 하지만 다가온 건 왜군이 아니라 조선의 어선단이었다. 낭패한 원균은 남겨둔 함선 한 척에 올라 옮겨 다니면서 이순신에게 부하를 보내 빨리 경상도 바다로 출전해서 구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


당시 상황은 조선 수군에 매우 불리했다. 약속한 출동 시기에 경상우수영 수군이 스스로 무너졌고, 전라우수영 수군은 준비가 늦어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계획을 변경하지 않았다. 조선 수군의 출동이 늦을수록 남해안을 공략하는 일본군 세력이 더욱 창궐할 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우리 함대 뒤를 빨리 따라오라!"는 전갈을 보낸 뒤 5월 4일 새벽에 전라좌수영 함대를 거느리고 경상도 바다로 진군했다. 출동 함대는 판옥선(전함, 대선) 24척, 협선(중선) 15척, 포작선(소선) 46척으로 이루어졌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전쟁 발발 이후 도처에서 공포에 질린 벼슬아치들이 맡은 지역을 버리고 왜군 없는 쪽으로 달아나던 때 이순신은 왜군이 없는 자기 지역을 떠나 왜군이 횡행하는 경상도 바다로 진군했다. 그 행보는 실로 눈부시도록 강력했다. 그 시기에 그렇게 행동한 장수는 그가 최초이자 유일했다.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처럼 장렬한 행동을 하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나라의 주인이자 군사 지도자로서의 자각이었다. 이 나라는 내가 몸소 지켜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와 소신이 그처럼 단호한 행위로 발현된 것이다.


이순신 함대가 경상도 바다에서 전함 한 척을 타고 온 경상우수사 원균과 만난 날은 5월 6일. 연락을 받은 경상우수영 소속 장수들이 남은 함선 3척과 협선 2척을 타고 와서 합류했다. 이튿날 이들은 거제도 옥포 포구에서 적선 50여 척과 마주쳤다. 전투가 벌어졌고 치열한 접전 끝에 조선 수군이 승리했다. 쳐부순 적선은 26척, 임진왜란 발발 이후 최초의 승첩으로 곧 '옥포해전'이다. 너무 막강하여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왜군을 상대로 거둔 조선 수군의 최초 승첩 소식은 조선 팔도를 뒤흔들었고, 공포에 질려 있던 조선인들에게 저항할 용기와 힘을 주었다.


그런데 옥포해전 이전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독자적으로 일본 수군과 싸워서 10척을 깨뜨리고 불살랐다'는 오해가 있다. 사실이라면 임란 최초의 승첩인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경상우수영을 스스로 무너뜨린 원균이 뒷수습을 위해 급히 이순신에게 보낸 공문 안에 그런 말을 끼우고 동시에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서 본영(本營)이 함락됐다"고 주장해 실제 전투가 있었던 것처럼 꾸몄다. 그 통보를 받은 이순신이 당시 장계 규정에 따라 원균으로부터 그런 내용의 공문을 받았다고 급히 쓴 장계를 선조에게 올렸기 때문에 원균의 거짓 주장이 역사에 남았다.


원균이 적군이 오기 전에 스스로 경상우수영을 무너뜨린 행위에 대한 증거는 많다. '경상우수영은 수사와 우후가 스스로 군영을 불태우고 (…) 수사는 배 한 척을 타고서'(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의 장계. 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28일) 등인데, 그중 압권은 공신도감의 기록이다. 선조 36년(1603년)에 임란에서 싸운 장수들을 공신으로 책정하는 심사가 있었다. 공신도감은 '원균을 1등 공신으로 책정하라'는 선조의 강요에도 굳이 2등 공신으로 정했던 이유를 '원균은 당초에 군사가 없는 장수(無軍將)로 해상대전(海上大戰)에 참여했고, 뒤에는 수군을 패전시킨 과실이 있어서'(선조실록, 선조 36년 6월 26일)라고 밝혀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