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대군'이란 수식어가 붙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100만이란 숫자다. 특히 인구가 많았던 중국의 경우에는 진시황제가 천하통일을 하려고 일으킨 백만대군부터 삼국지의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끌고간 백만대군까지 일단 전쟁을 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하면 100만으로 나온다.
이 백만에 대한 로망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라 어마어마한 대군을 상징하는 의미처럼 쓰여왔다.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에 벌어졌던 테르모필레 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 '300'에서 레오니다스 왕을 중심으로 한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은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묘사된다. 실제 이 전투를 사서에 기록한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의 군대가 170만명에 이른다고 적었다.
그러나 실제 1차 세계대전 이전, 전 근대시기 전쟁에서 한 나라가 100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한 사례는 단 하나로 중국 수(隋)나라 양제(楊濟)의 고구려 침공 때가 유일하다. 서기 612년,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에 무려 113만380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동원했다. 이들의 군량과 보급물자를 운송할 병력까지 합치면 약 340만명 이상의 청년들이 징집됐다고 전해진다. 이는 오늘날 우리나라 전체 예비군 전력보다 많은 숫자다. 이때 수나라 인구는 약 7000만~1억명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사실 이런 엄청난 병력 동원능력은 진시황이 통일하던 시절부터 인구가 천만단위를 넘어가던 중국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대부분 고대국가에서 100만은 한 나라나 민족 전체 인구와 맞먹는 숫자였다. 중국 역시 통일된 상황이 아닌 이상 100만명을 동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흔히 삼국지에서 백만대군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조조지만, 이 대단한 조조 역시 적벽대전에 100만 대군을 이끌지는 못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화북 전체 인구가 2000만~2500만명 정도임을 감안하고 군량 보급 등을 고려하면 일단 형주 공략 당시 15만명 정도를 끌고 갔고, 여기서 형주군이 항복하면서 10만 정도의 병력을 고스란히 얻었으며 적벽으로 진격했을 때는 양군을 합쳐 25만명 정도의 병력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비 역시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의 복수를 위해 75만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갔다는 내용이 삼국지연의에는 나와있다. 그러나 촉나라의 경우 멸망할 때 인구가 남녀 합쳐 100만명을 조금 상회하는 수준임을 고려하면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적벽대전 이전 삼국지에 등장하는 군벌들의 동원능력은 최대가 10만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조조가 관도대전에서 맞섰던 원소(袁紹) 역시 삼국지연의에서는 70만 대군을 이끌고 온 것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10만명 정도, 여기에 맞서 조조는 약 3만~5만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대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은 머리가 아니라 배(腹)로 한다"는 나폴레옹의 명언처럼 대군을 동원하려면 당장 이들을 먹일 식량이 훨씬 큰 문제였다. 결국 대군을 뒷받침할 경제력이 탄탄해야했으나 1년농사의 풍·흉에 따라 들쭉날쭉한 농업생산량에 모든 식량문제가 달려있던 전 근대시기, 백만에 이르는 대군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왜 백만대군이란 수식어가 그처럼 많이 나오는걸까? 사실 고대에는 백만이란 숫자는 '엄청나게 많다'는 의미의 형용사와 같이 쓰였다. 흔히 큰 부자를 의미하는 '백만장자(millionaire)'라는 말처럼 백만이 붙으면 일단 막대한 숫자란 의미였다.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을 서양에서는 '백만의 서(Il Milione)'라 불렀던 것도 그가 중국의 엄청난 인구와 경제력을 표현하기 위해 수없이 많이 백만이란 단어를 써댔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1만이란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11세기 경 주(周)나라 때임을 감안하면 고대사회에서 100만이란 숫자의 위상은 대단히 컸다. 10만은 고대 국가들도 총동원을 할 경우 만들 수 있긴 한 규모고 1000만은 아예 상상조차 못할 숫자이기 때문에 100만 정도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숫자였던 것.
또한 고대나 지금이나 군대의 정확한 숫자는 기밀사항이었으며 직접 군을 통솔, 운영하는 총사령관 외에는 병사 숫자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아군 사기를 높이면서 적군에겐 공포심을 불어넣기 위해 흔히 병력수를 '뻥튀기'시키는 게 다반사였다. 일단 출발할 때 실제보다 2~3배 정도 병력이 많다고 선전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소문이 꼬리를 물면서 공포심이 병력 수를 더욱 키웠다. 없는 백만대군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디지털뉴스본부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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