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왜군 상륙 공격에 경상좌수영 이틀만에 무너져
공포심 휩싸인 경상우수영, 조선 어선을 왜선으로 오인해
무기 바다에 버리고 스스로 해산.. 이순신 전라좌수사가 구원 나서
선조 25년(1592년) 4월, 일본군이 조선을 침공할 때 전체 병력 규모는 약 33만명에 달했다. 군사적 성격에 따라 구분하면, 직접 조선에 건너갈 침공군 20만명, 출발 거점 나고야에 주둔한 대기군 10만명, 수도(교토) 수비 병력 3만명이었다. 당시는 조선 전체 인구가 600만명에도 미치지 못하던 때였으니 엄청난 규모의 적이었다. 4월 13일 저녁 400여 척 대선단으로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1번대의 2만명 이후 10번대까지 침공군은 연이어 조선 땅에 상륙했다. 조선 측엔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는 말 그대로였다.
첫 싸움이 벌어진 부산진성은 경상우수영에 소속된 수군의 큰 진이었다. 성주(城主)인 정발은 수군 첨사였다. 그러나 부산 앞바다 절영도 근처에 정박한 왜군의 세가 심히 강성하고 수효가 엄청난 것에 질려 수전(水戰)으로 싸워보려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날 밤 그가 다급하게 조치한 일은 부산진성 소속 전함들을 바다에 가라앉혀서 적군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한 것이었다. 그는 전선에 올라 바다에서 수전으로 적과 싸우기보다는 부산진성 안에서 성벽을 방패 삼아 육전(陸戰)으로 대결하겠다고 결정했다. 참혹한 고육책에 불과한 절망적 결정이었다.
피아(彼我)의 규모는 아군 약 1000명 대 적군 1번대(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소속 1만8700명이었다. 무기 차이도 커서 아군은 창, 활, 칼 등 재래 무기였는데, 적군은 신종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선진형 군대였다. 14일 새벽에 상륙한 일본군의 포위 공격으로 시작된 부산진성 전투에서 조선군의 패전은 필연이었다. 통렬하고도 절망적인 항전으로 세 시간쯤 싸우다가 정발이 머리에 조총 탄환을 맞고 숨지자 전투는 끝났다.
다음 날 아침 일본군의 포위 공격으로 벌어진 동래성 전투는 부산진성 전투의 재판이었다. 동래성 역시 수군에 속한 성이었지만 부산진성과 달리 함락당하기 전에 전함과 무기 등을 바다에 가라앉혔다는 기록조차 없다. 모두 일본군에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군 상륙 이틀 만에 경상좌수영 소속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무너지고 일대가 모두 일본군 점령 아래 들어가자 동래에 있던 경상좌수영의 본영도 함께 무너졌다. 경상좌수사 박홍이 도망 다녔다는 기록만 남아 있는데, 전쟁 발발 이틀 만에 1만명 이상이었던 경상좌수영 수군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들은 조선 수군의 3대 수영(水營) 중 하나이면서도 침공군을 가로막으려는 단 한 번의 수전조차 시도하지 못했다는 치욕을 안은 채 증발했다. 일본군은 동래성 다음에는 밀양성과 김해성을 빠르게 함락시키는 등 속전속결로 점령지를 확장하면서 조선의 수도 한양성을 향해 급속도로 진군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투에 져서 함락당하는 성들 외에 공포에 싸인 관리와 백성들이 미리 달아나서 텅 빈 성을 일본군이 무혈 점령하는 일도 늘어갔다.
급보를 받은 선조와 조정은 경악하여 급히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9년 전인 선조 16년 여진족 니탕개의 겨울 침공 때 구원군으로 명성을 올렸던 신립을 도순변사로 임명하여 남쪽으로 내려가서 적을 막도록 조치하고, 선조 21년 시전부락 전투 때 토벌군 대장이었던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해 적을 막도록 명했다. 그러나 신립은 첫 전투인 충청도 충주의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했고 이일 역시 첫 전투부터 패해 군사를 모두 잃었다. 선조는 황급히 수도를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날 계책을 세웠다.
이때 남해 해안에서 새로운 대형 악재가 발생했다. 전쟁도 없이 경상우수영이 일시에 무너졌다. 일본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군에 의해서였다. 경상좌수영이 일본군의 침공 이틀 만에 무너져서 사라지자 경상우수영을 책임진 수사 원균은 심한 공포에 싸였다. 공포는 자주 착각을 부른다. 4월 28일, 멀리서 다가오는 조선의 어선단을 일본군 선단으로 오해한 그는 황급히 전함 바닥에 구멍을 내어 바다에 가라앉히고 무기들도 바다에 던지고 수군을 해산했다. 그러나 이내 확인된 사실은 극히 처참했다. 왜적은 오지 않았는데 경상우수영만 스스로 무너진 것이었다.
남해에 있는 수영(水營) 네 곳 중에서 경상좌수영과 경상우수영과 전라우수영은 소속 수군이 1만여 명 이상이었고, 전라좌수영만 5000명이었다. 이리하여 개전 15일 만에 남쪽 국경인 바다를 지키는 조선 수군 3만5000명 중에서 2만여 명이 사라지고, 남해 바닷가에 남은 조선 수군은 전라도 수군 1만5000여 명뿐인 상황이 됐다. 적과 부딪쳐 싸우기도 전에 패장이 된 원균으로서는 그 비참하고 황당한 국면을 전환할 묘책이 달리 없었다. 그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군으로 경상도 바다로 건너와 왜적과 싸워주기를 간청했다.
'人文,社會科學 > 歷史·文化遺産' 카테고리의 다른 글
[火요일에 읽는 전쟁사]걸핏하면 '백만 대군', 운용은 가능했을까? (0) | 2017.04.26 |
---|---|
"위대한 해전 전략가".. 세계 속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0) | 2017.04.20 |
[신병주의 '왕의 참모로 산다는 것'] (6) 평가 엇갈리는 세조의 참모 '신숙주' 쿠데타 진영의 충신 vs 대일 외교의 달인 (0) | 2017.04.17 |
[숨은 역사 2cm] 아이슬란드 협곡에서 세계 첫 의회 탄생 (0) | 2017.04.14 |
[숨은 역사 2cm] 조선 선비들 문경새재 좋아하고 낙지는 피했다 (0) | 2017.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