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와 수양대군은 사은사 동행 이전부터 마음이 통했던 사이인 것으로 전해진다. 실록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452년 8월 10일 수양대군은 집 앞을 지나가는 신숙주를 불러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수양대군은 “옛 친구를 어째서 찾지 않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지 오래였다. 사람이 다른 일에는 목숨을 아끼더라도 사직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고 신숙주는 “장부가 아녀자의 손안에서 죽는다면 ‘집에서 세상일을 모르는 것’이라고 할 만합니다”라고 화답했다. 이어 수양대군은 즉시 “그렇다면 나와 함께 중국으로 가자”고 했다. 이때부터 수양대군과 신숙주는 한배를 타게 된다.
▶세조와 한배를 탄 신숙주
▷성삼문과 반대되는 길을 걷다
신숙주의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 또는 희현당(希賢堂), 본관은 고령(高靈),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아버지는 공조참판(종2품)을 지낸 신장이고, 어머니는 정유의 딸이다. 1438년(세종 20년) 생원·진사시를 동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문과에서 3등의 뛰어난 성적으로 급제한 후 세종의 총애 속에 집현전 부수찬(종6품), 응교(정4품), 직제학(정3품)과 사헌부 장령(정4품), 집의(종3품) 등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443년(세종 25년)에는 서장관으로 일본 사행에 동참했고, 이때의 상황은 ‘해동제국기’의 저술로 이어졌다.
1453년 10월 10일의 계유정난은 신숙주의 운명을 또 한 번 바꿔놨다. 계유정난 이후 단종은 허위(虛位)를 지키고 있을 뿐 실권은 완전히 수양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1455년 윤 6월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을 압박해 상왕으로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다. 세조는 왕이 된 후 집권의 명분과 도덕성의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민본정치, 부국강병책, 왕권의 재확립 등의 정책을 펼친다. ‘경국대전’이나 ‘동국통감’과 같은 학술, 문화 정비 사업에도 애쓴다. 세조대에 만들어진 기반은 성종에 이르러 조선 전기 정치, 문화를 완성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세조의 정치 질서 정비와 학술 문화 사업 추진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신숙주였다. 신숙주는 계유정난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후에는 연이어 일등공신이 되면서 승승장구했다. 1455년 10월에는 특명으로 세조의 즉위를 알리는 주문사로 명나라에 갔다. 세조 집권 후 신숙주는 병조판서, 우의정 등을 거쳐 1466년 영의정에 오른다. 이 시기 ‘국조보감’의 편찬에도 참여하고, 북방 여진족 정벌의 경험을 ‘북정록(北征錄)’으로 남기기도 했다.
“세조를 조우해 계책이 행해지고 말은 받아들여져 세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신숙주는 나의 위징(당나라 초기의 공신)이다’라며 매양 큰일을 만나면 반드시 물어보았다. 왕으로 즉위함에 미쳐서는 보양(輔養)하고 찬도(贊導)하는 공이 많았다.”
이처럼 실록에서는 세조와 신숙주의 관계를 당나라 태종과 위징의 관계로 비유했다.
신숙주는 흔히 성삼문과 자주 비교되곤 한다.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성삼문과 신숙주는 특히 문장과 어학에 뛰어나 훈민정음 반포에 깊이 관여했다. 두 사람은 중국의 음운학자 황찬을 만나기 위해 열세 번이나 머나먼 요동길을 함께 오가면서 절친한 우정을 쌓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후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성삼문은 단종 복위운동을 주도한 사육신의 대표적 인물로 수양대군의 불법적인 왕위 찬탈에 맞서 저항하다 처형으로 삶을 마감한 반면, 신숙주는 수양대군을 도와 세조 이후 성종대에도 국가 원로가 돼 학문과 문화 창조의 위업을 쌓는다.
성삼문과 신숙주는 사후에도 엇갈린 행보를 보였다. 죽음으로 의리를 지킨 성삼문이 충신의 대명사로 조선시대 내내 추앙을 받은 반면, 신숙주는 뛰어난 학문적 자질에도 불구하고 수양대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변절한 지식인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다.
원래 녹두의 싹을 내어 먹는 나물로서, 두아채(豆芽菜)란 이름으로 불렸던 나물이 ‘숙주나물’로 바뀐 것에도 신숙주의 행적을 응징하고자 하는 백성들의 증오가 담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조선 전기 정치, 문화 정비의 최고 주역이었지만 신숙주에게 이처럼 가혹한 불명예가 붙여진 까닭은 16세기 이후 충절을 지고의 가치로 여겼던 사림파의 정치의식이 후대에 계승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 기행문 ‘해동제국기’
▷조선 전기 대일 외교관계 정리
1443년(세종 25년) 신숙주는 세종의 명을 받들어 일본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병마에 시달리다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가족들도 긴 여행을 우려했으나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직책은 서장관으로서 통신정사, 부사에 이어 서열 3위. 서장관은 외교뿐 아니라 문장에 특히 뛰어난 사람이 임명되는 직책으로 세종은 집현전 학자로 있던 신숙주에게 큰 믿음을 보였다. 신숙주 일행은 7개월간이라는 당시로서는 짧은 기간 동안에 외교적 목적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특히 대마도주와 체결한 계해약조는 당시 외교 현안이었던 세견선(일본이 해마다 보내는 배)과 세사미두(해마다 바치는 쌀)의 문제를 해결했다. 한편 그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명성을 듣고 온 일본인들에게 즉석에서 시를 써 그들을 감탄하게 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해동제국기’는 신숙주가 일본에 사행을 다녀온 지 28년이 지난 1471년(성종 2년) 겨울에 완성됐다. 이처럼 긴 시일을 두고 완성된 것은 이 책이 단순한 개인 기행문이 아님을 의미한다. 저자의 일본 사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의 외교 관례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조선 전기 대일 외교의 축적된 경험을 모아서 편찬했다. ‘해동제국기’는 신숙주의 서문과 7장의 지도, ‘일본국기(日本國紀)’ ‘유구국기’ ‘조빙응접기’로 구성됐다.
신숙주는 서문에서 “동해에 있는 나라가 하나만은 아니나 일본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나라다. 그 땅은 흑룡강 북쪽에서 시작해 제주 남쪽에 이른다. 유구국과 서로 접해 있으며 그 세력이 심히 크다”고 표현했다. 해동제국기의 일본 지도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목판본 지도로서 현재 전해지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랜 지도로 평가받는다. 조선식의 독특한 파도무늬가 바다에 그려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신숙주는 ‘해동제국기’를 통해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수차례 표현했다.
“신은 듣건대 ‘이적(夷狄)을 대하는 방법은 외정(外征)에 있지 않고 내치에 있으며, 변어(邊禦)에 있지 않고 조정(朝廷)에 있으며, 전쟁에 있지 않고 기강을 진작하는 데에 있다’ 했는데 그 말이 이제 징험(어떤 징조를 경험함)이 됩니다.”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전란을 막기 위해선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임종 직전에도 성종에게 ‘일본과의 화호(和好)를 잃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신숙주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0년 전에 이미 일본인의 호전성을 간파했던 것이다.
‘해동제국기’는 완성 이후 대일 외교에 있어 중요한 준거가 돼 외교협상에서도 자주 활용됐으며, 일본 사행을 떠나는 통신사들의 필수 서책으로 자리 잡았다.
그동안 신숙주에 대해서는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세조의 대표적인 참모라는 점 때문에 부정적 평가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언어학에 대한 감각, 외국어에 두루 능통한 학자 관료라는 점은 당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03호 (2017.04.11~04.18일자) 기사입니다]
'人文,社會科學 > 歷史·文化遺産'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대한 해전 전략가".. 세계 속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0) | 2017.04.20 |
---|---|
[송우혜의 수요 역사탐구] 공포에 굴복하면 싸우기 전에 무릎 꿇는다 (0) | 2017.04.19 |
[숨은 역사 2cm] 아이슬란드 협곡에서 세계 첫 의회 탄생 (0) | 2017.04.14 |
[숨은 역사 2cm] 조선 선비들 문경새재 좋아하고 낙지는 피했다 (0) | 2017.04.13 |
[송우혜의 수요 역사탐구] 도요토미의 '조선 채색 지도' 對 이순신의 '거북선' (0) | 2017.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