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國時代 평정한 도요토미.. 탁월한 무장이자 전략가
오랜 태평성대 누린 조선은 애초에 싸워봐야 극히 불리
위기가 닥치자 비로소 충무공의 對備정신 빛나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오후 6시쯤, 일본 침공군 대선단이 부산에 도착하여 해안에 정박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일본군은 부산진성 공격을 시작했다. 부산진 첨사 정발은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고 부산진성은 그날로 함락됐다. 이로써 장장 7년을 끈 대전쟁 임진왜란이 막을 열었다.
일본의 새로운 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도한 조선 침략 준비는 매우 치밀하고 조직적이었다. 그는 무력으로 일본을 통일하여 100년에 걸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끝장낸 뛰어난 전쟁 전문가답게 매우 노련하게 조선 점령 계획을 세웠다. 그는 선조 24년 1월부터 한 해 전부를 조선을 칠 전쟁 준비에 쏟았다. 각 지역 영주들에게 녹봉에 따른 비율로 함선 건조와 군사 동원의 규모와 전쟁 비용을 할당했다. 또 침공군 편성과 군수물자 확보·비축과 보급 및 전시 특별통신 체제를 정비하고, 조선을 점령한 뒤 각 지역을 통치할 일본인 무장까지 미리 배정했다. 또 조선에 건너갈 장수들의 처자를 인질로 오사카성에 잡아두었다. 그처럼 용의주도했던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 준비 조치 중 압권은 '조선 채색 지도'였다.
그는 새로 제작한 조선 지도를 침공군에게 나눠주었다. 대마도주가 바친 조선 지도를 여섯 부분으로 나눠 각기 다른 색을 칠한 지도였다. 일본 침공군은 경상도, 경기도, 전라도 등 조선 지명을 제대로 외우거나 발음하기 힘들뿐더러 혼동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빚어질 차질을 방지하려는 목적에서 누구나 보면 확실하고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색깔로 조선을 구분했다.
경상도: 백국(白國), 전라도: 적국(赤國), 충청·경기도: 청국(靑國), 강원·평안도: 황국(黃國), 함경도: 흑국(黑國), 황해도: 녹국(綠國).
지방별로 색깔을 정한 다음, 일본 특유의 전통인 나라 안 각 지역에 다시 '국(國)'자를 붙이는 방식을 적용해 제작했다. 임진왜란 시기에 일본군은 그 지도가 매우 편리했으므로 공문서에도 '백국', '적국' 등으로 표기했다고 한다(이형석, '임진전란사'). 그 지도는 일본 침공군의 전쟁 능력을 크게 확장시켰다. 전쟁 전문가로서 도요토미가 갖고 있던 명쾌한 재능과 두터운 관록이 매섭게 확인된다.
도요토미가 그처럼 치밀하고 무섭게 전쟁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조선은 어떠했던가. 우선 크게 주목할 것이 있다. 임진왜란 발발 이전 100년간 두 나라 국민이 경험한 역사의 다름이다. 그간 일본은 명칭조차 '전국시대'라고 불린 전쟁 시기가 100년간 지속되면서 도처에서 영주와 영주가 싸우고 백성이 백성과 싸우는 끝없는 전쟁으로 모두 막중한 고통을 겪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전쟁 무기가 발달할 수밖에 없다. 한발 앞선 무기를 쓰는 자가 승리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모두들 새 무기 발굴과 사용에 사활을 걸었다. 그 결과 칼과 창의 시대는 가고 총포인 '조총(鳥銃)'으로 싸우는 것이 대세가 됐다.
반면, 조선은 지난 100년 동안이 대부분 평화 시기였다. 간혹 왜구의 침공으로 큰 피해를 보기도 했으나 한시적인 짧은 전투로 상황이 끝났기 때문에 새 무기의 연구와 활용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니탕개의 난 때 종성진 전투에서 처음으로 새 무기 '승자총통'을 사용한 총포전으로 대규모 적군을 물리치면서 총포의 위력을 크게 경험했지만, 그 뒤 큰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잊힌 무기가 됐다.
두 나라의 통치 문화도 전혀 달랐다. 일본은 무력으로 승리한 자가 모든 것을 장악하는 무치(武治)의 나라인데, 조선은 무력을 경시하는 문치(文治)의 나라였다. 일본은 통치자가 결정하면 국민은 무조건 전쟁에 뛰어드는 풍토인데, 조선은 왜란 발발 직전까지 일부 문신을 중심으로 "민폐를 막는다"는 명분 아래 전쟁 준비 반대 움직임이 치열했다. 당연히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면 조선은 밀리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국운이 다하지 않았다. 남해 바닷가에 한 사람의 조선 무장,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버티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 침공을 확신했고 대책을 깊이 강구했다. 그가 최고 통치자의 시각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고민한 결과 나온 것이 신비주의 전략에 해당하는 새 무기 '거북선'의 제작이었다. 해전에서 거북선이 맹렬히 활약하기 시작하자 일본 수군은 처음 보는 조선 수군의 새 무기에 놀랐고 질렸고 위축됐다. 전쟁의 본질에 미친 양상에서 볼 때, 이순신의 거북선은 노련한 전쟁 전문가 히데요시의 조선 채색 지도 못지않은 영향력과 효능을 발휘했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앞세워 임진왜란이라는 무시무시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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