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잇단 고속 출세하자 계속된 모함으로 앞길 막던 上官
북방에서 니탕개의 난 발발하자 "전쟁 때 유능한 부하 필요하다" 자신의 군관으로 발탁해 중용
人材는 위기 때 도드라지는 법
생애 첫 벼슬인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종9품)의 임기 2년을 마친 뒤 훈련원 봉사(종8품·훈련원의 가장 말단 직책)로 임명돼 한양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이순신은 "모든 벼슬아치는 법에 정해진 임면(任免) 규정을 명확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그렇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확고한 소신이었다.
그 소신을 관철할 기회가 왔다. 병조 정랑(정5품) 서익이 훈련원에 인사 압력을 가했다. 자기와 친한 훈련원 봉사를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그 위 계급인 참군(정7품)으로 승진시키라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법의 규정을 들어 단호히 거절했다. 서익은 성품이 사납기로 유명한 데다 상급기관의 상급자였지만 '법'을 내세우며 꿈적 않는 훈련원 말단 관리 이순신에게 가로막혔다. 공교롭게도 그 일이 있은 뒤 이순신에게 고속 출세의 길이 열렸다. 그는 선조 12년(1579년) 봄부터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다가 임기가 끝나기 전인 그해 겨울 충청병사의 군관(7품 내지 6품)으로 승진했다. 또 그 임기가 끝나기 전인 선조 13년 가을에 다시 승진해 전남 고흥의 발포 만호(종4품)가 됐다. 동구비보 권관직 만기 복무 이후 불과 2년 미만에 무려 10단계를 뛰어오른 고속 승진이었다. 능력이 워낙 뛰어난 인재라서 계속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이순신의 생애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순이었고 매우 아픈 약점이었다. 그가 훈련원 봉사일 때 '법'을 내세워 서익의 요구를 즉각 거절했던 단호함을 자신의 삶에도 똑같이 적용했더라면 어떠했을까. 당연히 그처럼 빠른 출세는 불가능했다. 남에게는 엄격하고 나에게는 관대한 것, 그것은 어떤 조직의 구성원이건 간에 치명적인 약점이고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이다. 후일 이순신도 그 대가를 치렀다.
고속 출세에 대한 주위의 반감 때문이었을까. 발포 만호 자리는 풍파가 잦았다. 발포 부임 당시 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과 껄끄러운 사이가 됐고, 그의 후임인 이용은 처음부터 작심하고 이순신을 파면하려고 여러 억지 죄목까지 만들어냈다.
그때마다 이순신은 단호하고 기민하게 막아냈다. 그러나 선조 15년 봄에 서익이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임금의 특명으로 지방에 파견돼 무기를 검사하던 벼슬)으로 발포에 왔을 때는 달랐다. 발포 포구의 무기는 아주 잘 정비돼 있었으나, 서익은 장계를 올려 "발포의 무기는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라고 모함했다. 이순신은 그것을 알고도 방어하지 않았다. 그는 훈련원 봉사였을 때 서익을 상대로 "규정된 임기를 채우지 않은 관리는 승진시킬 수 없다"고 버텨서 이겼다. 그런데 그 후 자신은 거듭거듭 임기를 채우지 않고 승진한 결과, 종4품 발포 만호가 되어 다시 서익의 얼굴을 대하니 낯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서익의 악의에 찬 농간에 의해 이순신은 생애 첫 파면을 당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파면된 지 석 달 만인 그해 여름, 이순신은 다시 훈련원 봉사로 임명됐다. 그런데 이듬해인 선조 16년 1월, 함경도 육진에서 니탕개의 난이 발발했다. 전에 발포 만호 이순신의 상관으로 그를 파면하려 애썼던 이용은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종2품·약칭 남병사)로 임명돼 니탕개의 난 진압전에 출전하게 됐다. 그러자 부하를 보는 이용의 시각이 확 변했다. 평화 시에는 온순하고 말 잘 듣는 부하가 좋았지만 전시에는 유능하고 치밀하고 담대한 부하가 필요했다. 직접 겪어서 알지만, 그런 부하로는 이순신을 능가할 자가 없었다. 그는 안전한 후방인 서울의 훈련원에서 근무 잘하고 있는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달라고 요청해서 데리고 전쟁터로 갔다.
이순신이 함경도에서 보낸 시기의 모습과 경력에 관해서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우을기내 생포작전'에 성공하고, 포상 대신 처벌받아 종9품 건원보 권관으로 좌천됐다가 부친의 삼년상을 치른 후에 뒤늦은 포상으로 10단계를 뛰어오른 직급인 조산보 만호(종4품)로 임명되었다.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하다가 벌어진 녹둔도 전투 패전으로 백의종군 처분을 받았고, 석 달 뒤인 선조 21년(1588년) 1월 토벌전에 참전해 세운 전공으로 백의종군 처분에서 풀린 뒤 집에 돌아가서 지냈다.
다음 해인 선조 22년 봄에 전라감사 이광의 요청으로 그의 군관이 되어 전라 감영에서 근무하다가 조방장(3품직)으로 승진했다. 그해 11월에 차사원으로 상경했다가 전날의 의리를 중시해 정여립 역모 사건으로 옥에 갇힌 우의정 정언신을 문안하고 정읍 현감(종6품)으로 좌천당했다. 그리고 선조 24년(1591년) 2월 13일, 선조의 특명으로 전라좌수사(정3품)에 임명되었다. 이상이 무장 이순신이 임란 발발 이전에 밟아온 벼슬길의 전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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