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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역사 2cm] 앙투아네트 단두대 비극 씨앗은 '순혈주의'

바람아님 2017. 4. 11. 23:29
연합뉴스 2017.04.11. 09:01

한국생활 16년째인 외국인이 인종차별을 당한 사실이 알려져 파문이 일었다.

콜롬비아인 부부는 교통사고를 당할뻔한 아이를 구했다가 봉변을 당했다.

아이 엄마와 할아버지가 욕설을 퍼붓고 폭행했다고 한다.

경찰까지 가세해 인종차별 발언도 했다.


피해자는 이런 사연을 페이스북에 올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외국인 비하 실태를 비판했다.

세계화 시대에 역행하는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외국인 혐오에는 단일민족이라는 집단 무의식이 작용한다.

단일민족주의는 순혈주의로 포장돼 인류 평화를 위협하기도 한다.

순혈주의는 유전학적으로도 재앙이다.


스페인을 다스린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인 카를로스 2세도 '합스부르크 립'을 앓았다.

유럽 최고 왕실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동일혈통을 고집하다 비극을 맞은 사례다.

15세기 말부터 유럽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합스부르크 립'이라는 저주를 받았다.

대다수 후손이 길고 뾰족한 턱을 가진다.

턱을 가리려고 겨울에도 부채를 지녀야만 했다.

턱 유전자는 열성인데도 약 600년 이어졌다.

근친혼 탓에 부모 유전자 모두 열성이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은 고통스러웠다.

어긋나는 윗니와 아랫니로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해 위장병이 잦았다.

잠잘 때 열린 입으로 벌레가 들어가기도 한다.

왕실 보고는 서류 방식으로 바뀐다.

부정확한 발음으로 소통이 힘들자 구두 보고를 대체한 것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희생된 데도 턱 영향이 있었다.

왕비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공주 출신이다.

1770년 프랑스 루이 16세 왕과 국제결혼을 한다.

유럽패권을 놓고 다투던 프랑스와 화해하기 위한 정략혼인이었다.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실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국민 밉상이 된다.

적성국가 공주라는 이유에서다.


시중 호칭은 왕비 대신에 오스트리아 암탉이었다.

국민 반감은 어느 순간 증오로 돌변한다.

앙투아네트 초상화가 화근이었다.

턱 길이를 실제보다 줄여 그린 초상화다.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린 왕비를 배려한 작품이었다

초상화가 일반에 공개되자 시민들은 격분한다.

드레스가 화려한 데다 얼굴까지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자신들과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국가 빈곤은 왕비의 사치 때문이라는 소문이 자연스레 확산했다.

목걸이 사기 사건은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다이아몬드 540개를 박은 초호화 목걸이 사기 범죄가 터진다.

사건 배후에는 앙투아네트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훗날 백작 부인이 주도한 범죄로 밝혀졌지만, 국민은 진실을 외면했다.

염문설도 생겼다. 스웨덴 귀족을 내연남으로 뒀다는 풍문이었다.


먹을 빵이 없다는 백성에게 "그럼 케이크를 먹으라"라고 했다는 유언비어도 퍼졌다.

날조한 얘기였는데도 누구도 진위를 따지지 않았다.

앙투아네트는 여론이 나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서 이미지 개선 노력도 한다.

간소한 옷차림으로 자녀 3명에게 둘러싸인 그림을 전시한다.

사치스러운 왕비가 아니라 평범한 여성이라는 점을 알리려는 차원에서다.

이런 시도는 헛수고로 끝난다.


시민 분노와 증오는 갈수록 커져 결국 폭발했다.

군중은 베르사유 궁전에 난입하여 앙투아네트 부부를 감금한다.

부부는 4년간 유폐됐다가 결국 처형됐다.

앙투아네트는 온갖 수모를 당하다 죽는다.

처형 당일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수레에 태워져 시내를 돌았다.

긴 머리카락은 짧게 깎여 있었다.


이동로마다 악녀라고 저주하고 조롱하는 시민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혁명정부가 수많은 죄목을 열거해 처형했으나 진위 논란이 크다.

어느 죄목도 제대로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증거를 갖췄다는 7세 아들 성추행 혐의도 부실하기는 마찬가지다.


장시간 감금 끝에 받아낸 진술이어서 설득력이 약하다.

국고 탕진 혐의는 국민 분노에 편승해 적용했다는 반론이 나온다.

미국 독립전쟁 등에 지출한 비용이 재정 고갈의 주범이었다.

사치 죄목도 과장됐다.


파티나 가면무도회 등 사교 행사가 잦았지만, 죽을죄는 아니었다.

외국인으로서 겪는 소외감과 외로움을 달래려는 평범한 행사였다고 한다.

거만하고 무례했다는 소문은 왜곡된 정보로 보인다.

친절하고 배려심이 많았다는 평가가 더 우세하다.

다친 농민을 손수 치료해주고 감자 꽃을 꺾어 머리에 달고 다닌 일화도 있다.

단두대에서는 품위를 지켰다.


실수로 사형 집행관의 발을 밟은 뒤 "죄송해요. 고의가 아니었어요"라고 사과했다고 한다.

처형 직전에는 억울한 죽음이지만 복수하지 말라는 편지도 쓴다.

혁명 광풍이 잦아들자 부당 처형설이 우후죽순처럼 나왔다.

헌법보다 세다는 국민정서법에 걸려 희생됐다는 게 핵심이다.


순수 혈통 유전병을 숨기려던 그림이 '분노 마케팅'에 빌미를 줬다는 데는 다수가 공감한다.

초상화에 투영된 사치와 교만 이미지로 국민 분노를 키우는 혁명전략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대중은 자력으로 악녀를 단죄했다는 승리감에 부실한 범죄 증거에는 무관심했다.

법치국가 근간인 증거주의는 설 자리가 없었다.


단일민족의식도 재앙을 부를 위험성이 있다는 점에서 경계 대상이다.

순혈주의와 인종주의를 복제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