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미국 간 수교는 미국의 의지에서 시작했다. 미국은 조선이 가난한 나라여서 수교의 이익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관계를 맺으려 애썼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조선 근해에 난파된 선원 보호와 구원(舊怨) 해결. 조선과 미국은 이미 두 차례 싸웠던 전력이 있었다. 교역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평양 군민의 공격으로 불타 버린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과 강화도에서 조선군 343여명이 전사한 신미양요(1871)를 겪은 터.
프랑스(병인양요·1866)에 이어 미국까지 물리쳤다고 생각한 조선은 요지부동이었다. 일본의 강압에 못 이긴 강화도 조약(1876)으로 이미 개항했어도 양이(洋夷·서양 오랑캐, 구미 각국)에 대해서는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반면 미국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조선의 문을 열고 싶었다. 총대를 멘 사람은 해군 제독 슈펠트(Robert Shufeldt). 링컨 대통령 행정부에서 쿠바의 하바나 총영사를 지냈던 그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고종 4년(1867년) 황해도까지 왔으나 성과 없이 돌아갔던 인물이다.
슈펠트 제독은 1880년 다시금 조선과 교섭에 나섰다. 이번에는 조선과 수교한 일본에 부탁했다. 일본 외무경의 서신에 미국 국서를 끼어 보냈으나 조선은 봉투를 개봉하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실의에 젖었던 슈펠트 제독이 기회를 잡은 것은 중국과 접촉. 나가사키 주재 청국 공사관의 보고를 받은 청의 실력자 리홍장 북양대신은 슈펠트를 천진에 초청해 조선과 국교 교섭을 시작했다. 첫 교섭이 시작된 게 1880년 7월. 이때부터 4차례에 19개월에 걸친 지루한 협상이 이어졌다.
청나라는 왜 조선과 미국의 수교 협상에 앞장섰을까. 두 가지 속셈이 있었다. 무엇보다 강화도조약 이후 크게 커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맞설 다른 오랑캐가 필요했다. 나름대로 국제정세를 읽고 있던 청의 양무파는 영국과 미국을 저울질하다 후자를 골랐다. 영토 욕심과 대외 팽창 야욕이 영국보다 미국이 덜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기왕에 조선이 미국과 수교한다면 일본이 중재하는 것보다 청이 직접 맡는 게 낫다는 주판알을 굴렸다.
두 번째, 청은 조선을 중화적 종주속번체제(宗主屬蕃體制)의 보루로 여겼다. 중화 중심의 속방 가운데 류쿠(오키나와)와 베트남,라오스·버마·티베트 등이 서구 제국의 영향권으로 들어가고 조선과 몽골만 남은 상황. 어떻게든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을 불러들였다. 러시아와 일본 세력을 막으려 ‘이이제이(以夷制夷)’ 책략을 썼다. 중화 중심의 질서에 의존하는 전통적이고 느슨한 제국주의가 새롭고 강력한 미국의 제국주의와 손을 잡은 셈이다.
수교 교섭이 길게 이어진 원인도 조선을 속방으로 여기는 청의 입장이 강했던 탓이다. 청은 조약에 ‘조선은 청의 속국’이라는 조항을 넣자고 고집했다. 조선 조정은 여기에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았다. 오히려 반겼다. 김정기 전 서원대 총장의 연구논문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과 이권 침탈(1992)’에 따르면, 청에 영선사로 파견돼 있던 김윤식은 고종에게 ‘속국 조항은 중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기에 우리에게 이익이며 중국에 감사해야 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청은 이 조항이 포함되지 않으면 수교 교섭 자체를 깨트리겠다고 위협했으나 슈펠트 제독은 끝내 버텼다. 결국 이 조항은 조미수호통상조약문에서 빠졌다. 대신 조선 국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이 조약은 청의 동의 아래 성사됐다’는 조회문을 송부하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았다. 속국 조항 삽입이 좌절된 청은 조선과 또 다른 불평등조약을 맺으며 이 조항을 넣었다. 이름하여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왜 조약이 아니고 장정인가. 조선은 청의 속국이기에 조약보다 하위개념을 동원한 것이다.
길고 긴 교섭 과정에서 조선은 단 한 번도 제 목소리를 못 냈다. 수교 협상 테이블에 앉은 적조차 없다. 조인식에 나가 국새를 찍었을 뿐이다. 당연히 청과 미국의 이익이 우선 반영됐다. 쌀과 홍삼 수출 금지가 대표적인 케이스. 중국시장에 화기삼(미국산 인삼) 수출을 막 늘려가던 미국의 경제적 이익이 우선시된 것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핵심 내용은 크게 세 가지. 제 1조와 5조, 제14조**였다. 조선은 무엇보다 1조를 반겼다. ‘불공경모(不公輕貌)’, 즉 ‘제3국으로부터 부당하게 업신여김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는 뜻의 문구를 조선은 외세 침략을 막아줄 바람막이로 믿은 것이다.
제 5조의 내용은 관세 자주권. ‘세수(稅收)의 권리는 조선의 자주(自主)다’로 시작되는 5조에서는 관세율의 한도를 정했다. 민생 일용품의 수입세는 총 가격의 10% 이내, 양주나 여송연, 시계 같은 사치품 수입의 경우 30% 이내, 수출품은 10%로 묶었다. 관세 자주권을 명시한데다 세율도 비교적 조선에 유리한 편이었으나 13조의 독소조항이 5조의 장점을 점차 소멸시켰다. 13조의 내용은 최혜국 대우.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 유리한 조항이 있으면 미국에도 자동적으로 적용된다는 조항이었다.
최혜국 대우 조항 때문에 미국은 일본이 강화도조약을 맺으며 얻은 모든 특권을 보장받았다. 1883년 영국과 체결된 조·영(朝·英)조약에서 관세율이 수입 7.5%, 수출 5%로 낮아지며 미국도 혜택을 입었다. 조선의 관세 수입은 그만큼 줄었다. 1886년 조·불(朝·佛)조약에서 기독교 포교권도 풀렸다. 기독교 금지령이 무너진 뒤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은 고종과 명성왕후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으며 각종 이권을 따냈다. 1939년 운영권이 일본에 넘어가기까지 금광석 900만톤을 채굴한 운산금광과 경인철도, 한성(서울) 시내 전철 부설권, 수도 가설권이 미국인들의 손으로 헐값에 넘어갔다.
고종과 새로 부상한 이완용 등 친미파(뒤에 친일파로 전향)는 미국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만국공법과 조미수호통상조약에 근거해 미국이 조선을 지켜줄 것이라고 여겼다. 조약이 맺어지고 미국이 조선 주재공사를 북경과 동경 주재 공사와 동격으로 정했다는 소식을 자랑으로 여겼다. 얼마 안 지나 조선 주재 미국 공사의 격을 총영사급으로 낮췄어도 무조건적인 믿음은 바뀌지 않았다. 미국은 정말 조선에 힘이 됐을까. 정반대다. 겉으로는 불개입과 엄정중립을 유지하면서 뒤로는 일본 편을 들었다.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는 대가로 일본이 조선의 지배를 서로 묵인한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 이전부터 미국은 조선을 버렸다. 청일전쟁(1894)을 앞두고 미국은 ‘개입은 없다’는 신호를 보내 일본이 안심하고 청과 일전을 치를 수 있도록 방조한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러일전쟁(1904~1905)에서도 미국 정부는 일본 편을 들고 미국의 금융자본은 전쟁자금을 대줬다.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불법적으로 강탈한 을사늑약 직후 공관을 가장 먼저 철수시킨 나라도 미국이다.
대미 수교 135주년. 세상은 많이 변했어도 의문이 남는다. 조선을 버린 미국은 옛날 얘기에 그칠까. 미국이 자유중국(대만)을 버리고 중공과 통교의 물꼬를 튼 1972년 상하이 공동성명에서 닉슨 대통령과 저우런라이(周恩來) 총리는 ‘남이든 북이든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감성적이어서 강대국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대화를 나눴다. 서로 패권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명시한 상하이 공동선언을 도출하는 테이블에서조차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보호 대상’이라고 여겼다고 해석하면 과할까.
오늘날은 얼마나 다른가. 한국은 사면초가다. 중국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배치하려는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에 나섰다. 대국이라면서도 한국 연안 어족자원의 씨를 말리고, 치졸한 경제 보복에 나서는 중국의 행태에서 청의 오만이 읽힌다. 미국의 유력 정치인이 ‘일본은 동맹이고 한국은 파트너’라고 말하는 것도 과거와 꼭 닮았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한국에서는 나라를 사랑한다는 대중 집회에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가 나부낀다. 숭미(崇美)에 젖었던 구한말 어리석은 군주와 이완용 등 정치인들과 다를 게 없다. 내 나라의 안위를 남의 나라에 의존하려는 질기고 질긴 사대주의는 예전이나 지금이 여전하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통상조약 격인 조청수륙무역장정은 조선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했다. 청국 상인들에게 조선의 통제를 무시하고 마음껏 장사할 수 있는 길을 터줬다. 조선은 청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국제 정세에 어둡고 청에 대한 사대주의 의식이 뿌리 깊었던 데다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의 입김이 어느 때보다 강했던 탓이다. 청이 조선을 얼마나 업신여겼는지 장정에는 ‘물고기떼가 기선에 놀라 도망쳤을 때 청의 어선들이 서해안에 머물 수 있다’는 황당한 조항까지 포함시켜 연안 어업권마저 넘어갔다. 우리 영해는 물론 임진강 하구까지 떼로 지어 몰려와 어족을 싹쓸이하는 행태는 하루 이틀 된 적폐가 아닌 셈이다.
** 조선의 입장에서 보다 중시할 독소 조항은 따로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제 4조인 영사재판권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의 법률체제가 미국 수준에 이를 때까지 조선 내 미국인의 범죄나 사기를 미국 영사관이 미국 법률에 따라 처리한다는 영사재판권은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이었음에도 조선은 여기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일본이 개항 과정에서 서구 제국의 강압에 의해 받아들인 영사재판권을 수치로 받아들인 것과 대조적이다. 일본은 수많은 인재를 해외로 내보내 법률을 공부하고 국력을 길러 20세기 초 모든 나라로부터 영사재판권을 회수했다.
서구와 동등한 문명국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개항기 조선과 일본의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또 있다. 조선은 만국공법에 의존하면 평화와 안보가 보장될 것이라고 여겼지만 일본은 달랐다. 일본의 유신지사이자 개화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문명론(文明論之槪略·1875)’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수백 권의 국제법 서적도 대포 서너 문을 이기지 못한다. 아무리 뛰어난 우호조약도 화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대포와 화약이 바로 만국공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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