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한 가정에서 자라 부잣집 외동딸과 결혼
무과 시험 응시할 땐 인문학 지식도 활용해
종 9품으로 시작한 관직 4년 만에 종4품까지 올라
이순신에게 전라좌수사 임명은 생애 가장 큰 전기였다. 흡사 물이 부족한 좁고 얕은 구렁에서 헐떡이던 큰 물고기가 돌연 너르고 깊은 강 큰물 속으로 들어간 듯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능력과 힘과 열정과 소망을 모두 동원해 전라좌수사 직책 수행에 뛰어들었고, 결국 나라를 구한 역사적 대인물이 되었다.
전라좌수사가 되기까지 그는 어떤 삶을 살아서 거기 도달했던 것인가? 여기서 그가 살았던 그때까지의 인생 역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인종 원년(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서울 건천동에서 출생했다. '행록'에는 그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의 꿈에 돌아가신 참판공(그의 조부)이 나타나 "이 아이가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舜臣)'이라 하라"고 지시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순신이 청청하게 빛나는 국민 영웅이 된 후세에 소급해서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인다.
그의 형들과 동생 이름까지 모두 중국 전설상 뛰어난 통치자였던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이름과 직결되어 있다. 자식을 두고 가진 꿈의 크기로 말하자면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을 덮을 자가 별로 없다. 아들 넷을 둔 그는 장남은 삼황 중 첫째인 복희씨(伏羲氏)의 이름을 따서 희신(羲臣), 차남은 오제 중 한 사람인 요(堯) 임금에서 따서 요신(堯臣), 삼남도 오제 중 한 사람인 순(舜) 임금에서 따서 순신(舜臣), 사남은 순 임금의 뒤를 이은 통치자 우(禹) 임금에서 따서 '우신(禹臣)'이라 지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형들은 일찍 죽고 동생은 출세하지 못했다. 네 형제 중 오직 이순신만 이름에 걸맞은 위대한 영웅이 됐다.
이순신에 관해 잘못 알려진 것 중 하나가 그의 집안이 가난했다는 것이다.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현재 남아 있는 이순신의 모친 초계 변씨가 작성한 별급문기(재산을 증여할 때 쓰는 문서)를 보면 재산이 상당했음이 확인된다. 게다가 처가도 매우 부유했다. 장인인 전 보성군수 방진은 무술이 뛰어난 사람인데 재산도 많았다. 그래서 재산을 강탈하려는 떼강도가 사전에 모의하고 그의 집에 침입했다가 방진이 쏘는 화살을 맞고 도망갔을 정도였다. 방진은 슬하에 딸 하나만 두었는데 그 외동딸이 이순신과 결혼했다. 그래서 처가의 많은 재산도 이순신 가정에 상속됐다.
이순신은 처음에는 문과 공부를 했으나 만 21세 때 무과로 바꾸었고, 만 31세이던 선조 9년(1576년) 병자년 식년 무과 과거에 급제했다. 그런데 과거시험 과정에 특기할 일이 있었다. 시험 과목의 하나인 무경(武經) 강독에서 '황석공' 대목을 강(講)하게 되었는데, 시험관이 "장량(張良·한 고조의 천하 평정을 도운 책사)이 적송자를 따라가 놀았다고 하니 장량이 과연 죽지 않았을까요?" 하고 물으니, 이순신은 "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 정한 이치요. 또 강목에 임자년에 유후 장량이 죽었다고 쓰여 있으니 어찌 신선을 따라가 죽지 않을 리가 있으리오!"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시험관들이 놀라서 서로 돌아보며 "이것은 보통 무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고 크게 탄복했다('행록'). 이 일화는 이순신이 강목(綱目·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을 주자가 공자의 '춘추' 식으로 다시 정리한 역사서)을 명확하게 외우고 있을 정도로 인문학적 소양이 대단했고 기억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당대의 사회 풍속으로 그처럼 대견한 일화는 사대부 사회에 빠르게 전파됐으니, 이 일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이때의 이순신 모습은 아주 화려하다. 무과에 급제할 정도로 무술 훈련이 잘돼 있고, '장량에 관한 문답 일화'가 증명하듯 문과적 소양도 뛰어났다. 게다가 용모 반듯하고 재산까지 있는 무장이었다.
과거에 급제한 해에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종9품)으로 발령받은 그는 임기 2년을 마친 뒤에 서울의 훈련원 봉사(종8품)로 영전했다. 극지인 북쪽 변경에서 복무한 뒤 서울의 훈련원으로 영전한 것을 보면 그가 함경도 근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훈련원 소속 무관으로 복무하던 시기에 '모두 갖춘 무관 이순신'의 평판과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당시 훈련원 상급기관인 병조의 수장인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庶女)를 이순신에게 첩으로 주려고 매파를 보냈는데 이순신은 즉각 거절했다. 이유는 "벼슬길에 갓 나온 내가 어찌 권세 있는 집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까 보냐!"라는 것이었다. 당시 그가 하늘을 찌를 듯한 자긍심까지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병조판서의 심기를 거슬리고도 그의 출세는 빨랐다. 동구비보 권관에 처음 임명되고 3년 뒤 훈련원 봉사(종8품)가 됐고, 같은 해 겨울 충청 병사의 군관(6품 내지 7품 직)으로 승진했다. 이듬해 가을에는 전라도 발포 만호(종4품)로 뛰어올랐다. 과거 급제한 지 불과 4년 만에 종9품 벼슬에서 종4품 벼슬까지 승진한 것이다. 동시에 이때부터 그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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