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한국사의 안뜰] 애절한 순정, 어지러운 치정.. 역사 속 '愛' 더 뜨겁고, 더 자유로웠다

바람아님 2017. 6. 26. 09:27
세계일보 2017.06.24. 17:02

<47> 옛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 
/ '남녀유별' 절제·통제도 불구 조선시대 성 풍속 자유로워 
/ 성욕·통간 관련 충격 일화도 
/ 3년간 시묘살이 홍랑의 정성 
/ 남편 앞세운 원이 엄마의 심정 
/ 조상의 절절한 애정 길이 남아

"내가 평생 괴로워한 것은 남들에 비해 성욕을 억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이 서른 이전에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집착하여 성욕과 관련된 일이라면 세상에 창피한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통렬하게 반성하여 스스로 극복하려 했지만 끝내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서른너댓 살이 되어 기력이 빠지기 시작하였지만 마음만은 여전하였는데, 나이 마흔 이후로 기력과 마음이 아득히 사그라진 재처럼 되었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문인인 심노숭(沈魯崇1762~1837)이 쓴 기록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심노숭이 자신의 성욕에 대해 진솔하게 고백한 대목이다.  이렇듯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인 성욕은 지식인이라도 다를 바 없었다.


◆애절한 사랑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함경도 기생인 홍랑이 서울로 돌아가는 최경창에게 준 시조다. 최경창은 삼당시인(三唐詩人) 중 한 사람으로 불린 이름난 시인이었고, 홍랑은 매혹적인 시정(詩情)을 지닌 여인이었다. 최경창은 1573년 함경도 경성에 벼슬살이를 왔다가 홍랑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1575년 홍랑은 최경창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서울로 달려갔는데, 관기(官妓)를 데려왔다는 혐의를 받게 되자 함경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최경창은 돌아가는 홍랑에게 작별시 2수를 지어주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뒤로 살아서 만나지 못했다. 최경창이 죽고 홍랑은 전쟁 중에도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며 그의 시문을 지켰다. 홍랑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한 최경창의 후손들은 최경창 부부의 묘 아래 홍랑의 묘를 만들어 그의 사랑을 기렸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당시에는 ‘혹독한 사랑(酷愛)’이라고 불렸다.


사랑은 아름다움에 대한 끌림에서 시작해 최종적으로 아름다움 자체에 도달하는 모든 과정이다. 이성 간의 육체적 결합을 통해 사랑에 도달하기도 하고, 영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도 한다. 사랑 이야기가 인간의 영원한 소재가 되는 것은 공감과 울림의 미학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살아서 이별하고 죽어서야 영원한 사랑을 얻었다. 홍랑의 원래 이름은 애절(愛節)이었다. 아마도 지금도 사용하는 ‘애절하다’는 말에서 유래했을 법한데, 옛사람들이 음차해서 ‘愛節’이라고 하였으니 아름다운 사랑을 받아들이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손수 짠 미투리와 함께 관속에 넣은 원이 엄마의 편지.

◆원이 엄마의 편지

“당신 늘 내게 말씀하시길, 우리 둘이 머리가 희도록 살다가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하고 자식하고 누구를 의지하여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원이 엄마의 편지’는 또 다른 감동을 준다. 이응태는 1586년 서른한 살의 나이로 부모와 형제, 어린 아들과 아내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죽음 또한 의지와 상관없이 거쳐야 하는 인간의 공통된 통과의례이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는 젊은 아내는 절절한 심정을 편지에 담아 관 속에 넣어 주었다.


부부의 정은 남달랐고, 아내는 또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무심하게 떠난 남편을 원망하면서, 그리워 살 수 없으니 꿈속에 나타나서라도 답을 달라는 말은 안타까움을 더한다. 특히 원이 엄마는 이 편지를 손수 짠 미투리와 함께 관 속에 넣었다. 미투리는 삼실과 함께 사람의 머리털을 엮어 만들었는데, 아마도 자신의 머리카락이었을 것이다. 미투리를 감싼 종이에는 ‘이 신 신어보지도 못하고’라는 글이 있어 애절함을 더한다. 

최경창 부부와 관기 홍랑의 묘. 최경창과 홍랑의 관계를 당시 사람들은 ‘혹독한 사랑’이라고 불렀다.

◆다섯 부인의 사랑

옛사람들의 사랑이 이렇듯 지고지순한 것만은 아니었다. 1602년 박의훤은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며 요즘 세상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충격적인 내용을 담았다. ‘박의훤허여문기(朴義萱許與文記)’는 그가 다섯 아내의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며 작성한 고문서이다. 172마지기의 논과 51마지기의 밭, 7명의 노비를 나누어 주는 것이지만, 놀라운 것은 그에게 다섯 명의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 아내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이다.


“둘째 처 진대(進代)는 늙은 이 몸이 젊은 시절 함께 살 때는 강상을 지키더니 종놈과 통간하여 죽을죄를 지어 그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자 달아나서 영암 땅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옥천리에 사는 박식을 길에서 만나 서로 간통하여 살다가 부부가 함께 죽었다.”


아내가 일찍 죽어 다시 후처를 맞이한 것이 아니라, 앞서 네 명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달아났기 때문에 다시 장가를 든 것이다. 위에 예를 든 둘째 아내뿐만 아니라 이별한 다른 세 명의 아내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헤어졌다. 첫째 아내인 은화는 남의 남편과 바람이 나 살림을 차렸고, 셋째 아내인 몽지도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자식을 낳고 살았다. 박의훤과 간통하여 살림을 차렸던 넷째 아내 가질금도 이후 대여섯 명의 사내와 잠자리를 하다 끝내 박의훤을 버리고 나가 살았다. 마지막 아내인 여배(女陪)만이 40년 동안 결혼생활을 지속하며 함께 살았다. 물론 이 고문서는 많은 나이에 병마저 들자 박의훤이 재산을 상속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다섯 명의 아내 사이에서 낳은 살아 있는 오남매와 죽은 아들 삼형제에게 재산을 주는데, 핵심은 마지막 아내의 자식에게 대부분의 재산을 주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예전 아내들의 처신을 나열함으로써 차등 상속하는 당위성을 피력한 것이다.


박의훤의 신분은 적지 않는 재산을 축적한 것이나 관에 드나들었다는 진술로 미루어 상층의 양인이거나 향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와 아내들의 만남과 이별의 과정을 보면 우리가 아는 조선시대의 혼인제도와는 사뭇 다르다. 1602년이라는 시대적 특성과 박의훤과 그의 아내들의 신분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백성들이 만나고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과정에 자유로운 성 풍속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네 명의 아내가 바람난 대상도 제각각이다. 남의 남편은 물론 종까지도 성적 대상이었으며, 박의훤 역시 넷째 아내와 간통하여 살림을 차렸다. 16세기 말, 일반 백성들이 살아가면서 어떻게 이성을 만나고 사랑하였는지 그대로 알 수 있다. 혼인제도나 방법보다 육체적 사랑이 우선하고, 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혈연관계를 중시했던 것이 어쩌면 우리 옛사람들의 또 다른 사랑법일 수 있다. 


박용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절제 대상이었던 욕정

육체적 사랑이 만연하면 당연히 지배계층은 이것을 제어하려 하였다. 강원도관찰사로 나간 정철(鄭澈)은 ‘남녀유별(男女有別)’이라는 시조에서 “여자 가는 길을 사나이 피해 다니듯이/사나이 가는 길을 계집이 비켜 돌듯이/제 남편 제 계집 아니거든 이름 묻지 말라”고 하였다. 제 아내와 남편이 아니면 이름도 묻지 말라는 점잖은 가르침은 당시 백성들의 자유로운 성 풍속을 그대로 보여주는 반증이다.


‘동의보감’에서도 ‘정(精)’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어 그 양이 한 되 여섯 홉이며 무게로는 한 근 정도에 불과해 함부로 사용하면 결국 몸에 병이 든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사랑을 어찌 도덕적 가르침으로 통제할 수 있겠나. 사람은 태어나 살며 사랑하고,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의 살아가는 지혜를 이어간다. 자식과 그 자식의 자식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선(線)에서 개인이라는 점(點)은 치열하게 사랑하며 살아왔다. 숭고한 사랑, 이별의 그리움, 신분과 나이를 넘어서는 사랑, 미움으로 파국을 맞이하는 치정(癡情)에 이르기까지 그 사랑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고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옛사람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는 오는 29일부터 옛사람들의 사랑법을 모은 특별전 ‘옛사람들의 사랑과 치정’을 연다.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고 갈등하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 신분과 나이를 넘은 숭고한 사랑도, 불같이 타오르는 욕구를 절제하지 못한 사랑도, 때로는 애증으로 점철된 파국도 모두 옛사람들의 삶 이야기이다.


박용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