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6.28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46년 5월 9일. 구름이 잔뜩 낀 날씨 속에서 발굴 현장을 지켜보던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은 모든 것이 불안했다.
미 군정(軍政)을 겨우겨우 설득해 발굴에 착수한 지 8일째였지만 무덤이라는 확증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분 발굴을 위해 이미 집 한 채를 헐었고 동원된 사람만 185명에 달했으며 조선영화사 측에서 기록 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 호우의 바닥면.
/국립중앙박물관
다행히도 오후가 되면서 상황이 급진전됐다.
땅 밑 약 1m 지점에서 반짝이는 황금 장식이 보였다.
고분 부장품임을 확신한 김 관장은 그제야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 후 조사원의 손길이 무덤 바닥까지 도달했다.
무덤 주인공의 머리맡에 토기 여러 점과 청동 그릇 한 점이
있었다. 신라 고분 발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5월 14일. 금관이 출토되지 않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유물들을
수습하기로 했다. 첫 순서는 청동 그릇. 동그란 꼭지가 달린
뚜껑부터 먼저 수습하고 이어 몸체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던
조사원은 예기치 못한 발견에 "와!" 탄성을 질렀다.
그릇 바닥에 한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모든 조사원이 모여 그릇 바닥에 붙어 있는 흙을 제거하며
판독을 시도했다. '을묘년(415년), 3년 전 돌아가신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을 추모해 만든 열 번째 그릇'이라는 뜻의 16글자였다.
고구려 광개토왕을 위해 만든 제기, 청동 호우(壺杅)가 멀리 신라로 전해져 무덤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호우총 발굴은 이틀 후 종료되었지만 청동 호우는 5월 29일에야 화차에 실려 무장한 미군 병사 2인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로 옮겨졌다. 그 후 다시 71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호우총이 청동 호우보다 100년이나 늦은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고구려에서 만든 제기가 어떻게 신라에 전해졌고 왜 오랜 기간이 경과한 후 무덤에 묻혔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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