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7.05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국보 제163호).
‘백제사마왕’이라 적혀 있다. /국립공주박물관
1971년 7월 8일 충남 공주 송산리 언덕 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흘 전 우연히 발견된 무덤 발굴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김원룡 조사단장은 무덤 속을 살펴보려다 흠칫 놀랐다.
뿔 달린 짐승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이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鎭墓獸·도굴꾼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상상의
동물)임을 알아차리고 한숨을 돌리자 이번엔 네모난 돌판 두 장이 눈에 띄었다.
희미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위에 철전(鐵錢) 한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김 단장이 지시했다. "아직은 내색하지 마시오!" 이어 그는 백제사(史)에 밝은 공주박물관장과 함께 글자를 판독했다.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아, 사마왕! 무령왕이에요." 이 돌판이 바로 백제 25대 무령왕의
지석(誌石)이었던 것이다. 늘 발굴 복이 없다고 한탄했던 김 단장은 세기의 발견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김 단장이 이곳을 무령왕 부부 무덤이라고 공표하자 발굴 현장은 혼돈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시민들은 박수 치며 환호했고 언론사 취재 경쟁도 불붙었다.
그 와중에 널길 입구에 놓여 있던 청동숟가락을 외부인이 밟아 부러뜨렸다.
김 단장은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하루 철야 작업으로 발굴을 끝냈다.
후에 그는 이 결정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고 무령왕릉은 '최악의 발굴'이라는 오명을 쓰고 말았다.
그럼에도 왕릉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을 통해 우리는 백제와 백제인들을 만나게 됐다.
특히 지석에는 미지의 정보가 가득 담겨 있었다.
무령왕이 선왕인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삼국사기' 기록이 틀렸다는 점, 왕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천자의 죽음을
뜻하는 '붕(崩)'이라 표현한 점, 사후 2년 3개월이 지난 시점에 이르러 비로소 무덤에 안장됐다는 점 등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매지권(買地券·토지 매매 문서). 왕의 묏자리를 지신(地神)들에게 구입했음을 기록으로
남긴 것인데, 지석 위에 놓여 있던 철전 꾸러미가 바로 묏자리 구입 대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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