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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개혁가의 꿈과 좌절 '조광조' 훈구파에 막힌 유교적 이상정치 '4년 天下'

바람아님 2017. 6. 27. 10:12
매경이코노미 2017.06.26. 09:24
조선시대 개혁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인물, 바로 조광조(趙光祖, 1482~1519년)다.

그의 이름을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하면 총 910건이 나온다. 38세 짧은 생을 살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많은 숫자다. 그만큼 조광조는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한때는 중종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았던 참모였지만, 한순간 역모 혐의를 쓰고 나락으로 떨어진 인물. 그러나 그의 사후 사림파가 정치, 학문의 실권을 차지하면서 조광조는 사림파의 상징으로 거듭난다.


조광조는 서울 출생으로 개국공신 조온의 5대손이면서 훈구 가문 출신이지만 그의 인생은 사림파와의 인연으로 시작된다. 17세 되던 해에 평안도 어천 찰방(察訪, 현재의 역장)에 부임하는 아버지 조원강을 따라가는데, 때마침 평안도 희천에 유배돼 있던 김굉필에게 수학(受學)할 기회를 얻었다.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로 영남사림파 핵심 인물이다. 김굉필과의 만남은 조광조가 성리학에 심취하는 계기가 됐다.


1499년 한산 이씨와 혼인한 조광조는 이듬해 부친이 사망하자, 부친의 묘소 아래에 초당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1510년 과거 초시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했으나 이듬해 모친상을 당해 관직 진출은 늦춰졌다.

당시 조선의 왕은 반정에 성공한 중종. 하지만 중종은 박원정, 성희안, 유순정 등 반정공신 3인방 위세에 눌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3인방이 모두 사망한 뒤에야 자신의 정치적 꿈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이때 중종은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조광조를 만나게 된다.


1515년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한 알성시에서 중종은 “오늘날과 같이 어려운 시대에 옛 성인의 이상적인 정치를 다시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책문(策問)을 던졌다. 조광조는 “공자의 도는 천지의 도이며, 공자의 마음은 천지의 마음이기 때문에 이를 실천해야 한다는 점과, 왕이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明道) 항상 삼가는 태도(謹獨)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답안을 제출했는데 중종은 깊이 감명받았다. 이후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정6품 관직)을 거쳐 11월에는 정언에 올랐다.


중종은 홍문과 부제학, 동부승지 등에 조광조를 임명해 늘 가까이에 뒀다. 1518년 10월에는 오늘날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대사헌으로 발탁했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성리학에 입각해 다양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던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개혁 세력의 선두에 서서 다양한 정책을 급진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젊은 피를 수혈해 연산군과 차별화되는 왕이 되고자 했던 중종과 조광조 개혁 의지가 맞물리면서 두 사람의 밀월관계는 깊어졌다.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한마디로 말하면 유교적 이상정치와 도덕정치의 실현이다. 왕이 왕도정치를 수행하고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교화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 그가 추진한 개혁정치의 핵심이었다.

먼저 경연 활성화를 통해 왕이 끊임없이 성리학 이념을 교육받게 했다. ‘근사록’이나 ‘성리대전’ 등이 교재로 주로 활용됐다. 도교 제천행사를 주관하던 관청 ‘소격서’를 폐지함으로써 성리학이 아닌 이단 사상이 보급될 수 있는 길을 차단했으며, ‘소학(小學)’ 보급, 향약(鄕約) 실시를 통해 성리학 이념을 지방 구석구석까지 전파했다.

민생을 위한 개혁에도 착수해 농민을 가장 괴롭힌 공물(貢物·지방 특산물을 바치는 세금)의 폐단을 시정하고, 균전제 실시로 토지 집중을 완화했다. 아울러 토지 소유 상한선을 정해 부유층의 재산 확대를 막았다.


조광조는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정치 세력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과거시험 대신에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했다. 추천제 시험인 현량과를 통해 신진인사를 대거 영입해 개혁의 지원군으로 삼았다. 조광조의 개혁정책은 백성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에는 커다란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왔다. 갈등의 폭발은 위훈삭제(僞勳削除)였다. 위훈삭제란 중종반정 때에 공을 세운 공신 세력에게 준 훈작(勳爵) 중 가짜로 받은 것을 색출해 이를 박탈하자는 것. 공신의 친인척이나 연줄을 이용해 훈작을 받은 사람들의 토지나 관직을 몰수함으로써 구세력을 제거하고 신진 세력 중심으로 정치판을 재편하려 한 조치였다.


중종반정 때 박원종 등의 추천으로 확정된 공신은 거의 120명. 조선 개국공신(45명)이나 세조에서 성종대에 이르는 다섯 차례의 공신보다 많은 숫자였다.

중종이 조광조의 손을 들어주면서 공신 재조사가 이뤄졌을 때 위훈자의 숫자는 70명이 넘었다. 조광조는 가짜로 훈작을 받은 자들을 조사해 이들에게 준 관직, 토지, 노비와 저택 등을 몰수하면서 정치권 대변혁을 준비해나갔다. 조광조 입장에서 훈구파는 반드시 청산해야 할 대상이자, 적폐 세력이었다.


노골적으로 훈구파 기득권을 박탈하려는 조광조의 움직임에 훈구 세력도 더 이상 방관하지 않았다. 이들은 왕실이나 정치권에 심어둔 정치 세력을 적극 활용해 반격의 기회를 엿봤다. 훈구파는 왕에게 수시로 조광조의 위험성을 알렸다. 경연을 통해 왕을 압박하는 조광조가 왕권까지 넘보는 인물임을 강조했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파들은 후궁인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를 통해 중종에게 조광조를 모함하는 한편, 궁중 나인을 시켜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 走와 肖를 합하면 趙가 되므로 조 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라는 글씨를 유포시켰다. 나뭇잎에 새긴 글씨에 꿀을 발라 벌레가 갉아먹게 한 것. 한때 최고의 참모였지만 왕을 압박할 만큼 강한 개혁 드라이브에 지친 중종은 더 이상 조광조의 후원자가 될 수 없었다.


모든 상황은 조광조 일파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마침내 1519년(중종 14년) 11월 훈구 세력은 중종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만들어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고 비방했다. 1519년 11월 조정은 조광조를 전격 체포하고, 그의 죄상을 알렸다.


조광조의 죄목 중 가장 큰 것은 붕당을 맺어 자신의 세력을 확산시켜 나간다는 것이었다. 중종이 왕위에 오른 후 정책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혜성처럼 등장한 조광조는 중종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참모였다. 왕과 신하가 아닌 정치적 동지로서 두 사람은 결합했지만, 왕과 신하라는 다른 위치에 있던 두 사람의 동거는 언제든지 파국으로 치달을 위험성을 내포했다. 비록 반정에 의해 추대된 왕이었지만 점차 자신의 왕권을 확대해가려는 중종과 성리학에 입각해 왕권을 견제하려는 조광조의 입장이 충돌한 셈이다.


반정공신과 훈구대신 견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조광조를 기용했던 중종은 어느 정도 정치적 기반을 잡자, 더 이상 조광조에게 휘둘리기를 원치 않았다. 1519년 조광조를 숙청한 것도 왕권에 대한 조광조의 도전에 계속 수세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으리라는 계산 때문이었을 터다. 조광조는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으로 있던 정광필의 적극적인 변호로 목숨만은 건진 채 전라도 능주에 유배됐다. 그러나 훈구파인 김전, 남곤, 이유청 등 훈구파의 핵심들이 정국의 실세가 된 뒤, 결국 중종이 내린 사약을 받고 38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연려실기술’에는 조광조가 최후까지 중종에게 충성을 다한 모습이 기록돼 있다.


“조광조는 능성(綾城)에 귀양 가 있었는데, 북쪽 담 모퉁이를 헐고 앉을 때에는 반드시 북쪽을 향해 왕을 생각하는 회포를 폈다. 얼마 안 돼 사사하라는 명이 내리자 조광조가 말하기를, ‘왕이 신에게 죽음을 내리니 마땅히 죄명이 있을 것이다. 공손히 듣고서 죽겠다’며, 뜰아래 내려가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꿇어앉아 전지를 들었다. (중략) 조광조가 조용히 죽음에 나가면서 사자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죽거든 관은 모두 마땅히 얇게 하고 두텁고 무겁게 하지 말라. 먼 길을 돌아가기 어려울까 염려된다’며 시를 읊었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비 사랑하듯 하고/ 

나라 근심하기를 집 근심하듯 했도다/ 

밝은 태양이 땅에 임하였으니/ 

밝고 밝게 충성을 비추어주리


마지막까지 중종에게 충성을 다한 모습이 시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시를 지은 후 조광조는 사약을 마셨는데,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금부의 나졸들이 나가 목을 조르려 하자 조광조는, “성상께서 하찮은 신하의 머리를 보전하려 하시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러느냐”며 더욱 독한 약을 마시고 일곱 구멍으로 피를 쏟으며 죽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망을 받던 개혁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13호 (2017.06.21~06.27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