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12.04 정경원 세종대 석좌교수·디자인 이노베이션)
시계 문자판에 숫자가 없다면 어떻게 시간을 알 수 있을까?
1947년 미국의 산업디자이너 네이선 호윗(Nathan Horwitt)은 보통 손목시계들과는 전혀 다른 디자인을 창안했다.
얇은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스에 장착된 검은색 문자판에는 숫자가 하나도 없고 가운데 위쪽에 정오의 해를 상징하는
커다란 원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시간을 아는 데 별 어려움이 없는 것은 시침과 분침이 이루어내는 각도 덕분이다.
뮤지엄 워치(Museum Watch), 케이스
직경: 38㎜, 두께: 7㎜, 1948년 첫 출시.
호윗은 현대적인 미니멀리즘의 상징과도 같은 그 디자인 콘셉트를
시계 제조회사에 팔 계획이었다. 그런데 1948년 '제니스 모바도'라는
미국 시계 회사가 무단으로 그 콘셉트를 모방한 시계를 제작·출시했다.
하지만 호윗은 아직 디자인 특허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 제기만
했을 뿐 법률적인 제재를 가할 수 없었다. 1956년 호윗은 명품 시계
업체인 바쉐론 콘스탄틴에 의뢰하여 견본 시계를 세 개 제작했으며,
1958년 미국 디자인 특허를 취득했다. 그 이듬해에는 견본이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과 브루클린 미술관에 각각 영구 소장품으로
선정되어 '뮤지엄 워치'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와중에도 호윗은 모바도가 부당하게 자신의 디자인 권리를
침해했다는 민원을 계속 제기했다. 마침내 1975년 모바도는
2만9000달러(2017년 가치로는 약 13만5000달러)의 배상금을
호윗에게 지불하고 뮤지엄 워치의 디자인 특허권을 인수했다.
모바도 뮤지엄 워치의 후속 모델들은 199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선물로 꼽히는 등 대중적인
명품 브랜드(가격 500달러 내외)로 성장하여 모바도는 큰 수익을 거두었다. 200여 개의 디자인상을 수상하고 20여 개의
미술관에 소장될 만큼 뛰어난 디자인을 창안한 호윗이 받은 배상금이 모바도가 거둔 이익에 비하면 적을지라도 끝까지
자신의 디자인 권리를 지켜낸 신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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