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6.04 최보식 선임기자)
[공산권 카자흐스탄을 개혁·개방했던 인물… 방찬영 키메프대학 총장]
"'수령 유일 체제'를 안 버리면 核 없는 북한 못 끌고가
북한 위기는 전체주의의 내부 모순과 부조리에서 비롯돼
김정은은 영리하니까 북한 경제가 얼마나 버틸지 알 것
그가 위대한 지도자 될지, 역적으로 남을지 곧 판명돼"
서울에 온 방찬영(82) 카자흐스탄 키메프대학 총장을 만났다. 그가 먼저 내 생각을 탐색하는 질문을 던졌다.
"비핵화가 되면 문재인 대통령의 기대대로 한반도 평화 정착이 된다고 보나?"
―핵 폐기는 평화 정착의 한 부분이다. 북한이 핵무기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잘 봤다. 북한은 핵을 가져 적대적인 게 아니라 핵이 없던 시절에도 적대적이었다.
핵 포기는 평화 정착을 위한 필수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는 구(舊)소련이 해체된 뒤 카자흐스탄의 개혁·개방 작업을 했던 인물이다.
당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경제고문과 경제전문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 뒤로 그는 "북한 문제 해결이 마지막 숙원 사업"이라며 키메프대학 내 대북전략연구소를 운영해오고 있다.
―미·북 회담에서 비핵화가 합의되면 종전선언·평화협정으로 진행될 것이다.
남북 간 대화와 교류, 경제협력이 활발해지면 한반도 평화가 오지 않겠나?
"평화협정을 맺으면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가 변할 것이라는 판단은 잘못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비핵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 정착과 남북한 공동 번영을 이루겠다는 것인데,
북한의 '수령 유일 영도 체제'가 그대로 존속되는 한 외국인 투자자가 성경책을 갖고 들어갔다가 억류될 수 있고
북한 주민들의 대량 탈북 사태에는 군대를 동원해 강압적으로 막을 것이다. 정치범수용소도 계속 유지될 것이다.
이러면 미국과 수교가 돼도 알력과 분쟁이 생긴다. 언제라도 평화협정이 파탄 날 수 있다."
방찬영 총장은 “북한이 전체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남한은 경제 지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남강호 기자
―한반도 평화는 북한 정권이 수령 유일 체제를 포기할 때 가능하다는 뜻인가?
"바로 그 점이다. 김일성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북한과는 평화 공존이 될 수 없다.
한 사람의 명령에 모두가 노예처럼 움직이고 개인의 머릿속 생각마저 통제하는 전체주의하에서는 경제 발전도 이뤄질 수 없다.
이런 체제에선 당장 시장 개방부터 안 된다. 외국 자본과 기술이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다.
남한이 아무리 재정 지원과 투자를 해준들 북한의 경제 현대화는 불가능하다."
―김정은은 북한 경제를 위해 비핵화 카드를 꺼낸 것인데.
"경제 현대화는 생산 수단의 사유화, 경제 활동 자유화, 노동시장 자율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북한이 살려면 먼저 공식 지도 이념을 버려야 한다. 정치 개혁이 선행돼야 경제 개혁이 된다는 뜻이다."
―북한은 비핵화의 대가로 '체제 보장'을 약속받기 위해 미국과 협상을 벌여왔다.
그런 북한에 '체제를 포기하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미국이 해줄 수 있는 '체제 보장'은 북한을 국가로서 인정, 불가침 약속 같은 것이다.
하지만 비핵화 이후 북한 내부 동요나 쿠데타에 대해 미국이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김정은은 자신의 권력 기반이나 통치 체제를 미국이 흔들지 말라는 것 아니겠는가?
"앞으로 북한의 위기는 수령 유일 체제에 의한 내부 모순과 부조리로 발생한다. 그게 가장 위협적인 요소다.
역설이지만 북한이 존속하려면 체제의 기본 성격을 바꿔야 한다.
그게 바뀌지 않으면 핵을 포기하고는 존속할 수 없다."
―핵은 남한과 경쟁에서 유일하게 우위에 있는 것이다.
국제사회도 핵 때문에 북한을 그 비중 이상으로 상대해준 면이 없지 않다.
이 때문에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표시했다고 하지만, 과연 핵을 포기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핵을 지렛대로 한 북한의 '벼랑 끝 외교 전술'은 잘 먹혀들었고 국제적으로 대접을 받았던 셈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완전한 핵 폐기가 아니면 미국이 안 받아들일 것이다.
트럼프가 11월 중간 선거에서 점수를 얻을 것은 북핵 해결 하나만 남아 있다."
―북한이 핵무기 몇 개를 숨겨놓고 협정에 서명할 것이란 우려도 있다.
"설령 숨겨둬도 핵 포기 서명을 하고 나면 그 핵은 의미가 없어진다.
전술화해서 배치할 수 없고, 상대에 대한 협박용으로 사용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협정을 어기면 트럼프가 그걸 용납하겠나.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 편을 들 수가 없어진다.
가령 김정은이 '핵 포기 결정은 잘못된 것'이라며 인민들에게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했을 때
내부적으로 설득될 리가 없다."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강성대국'을 내걸었다. 주민들의 경제적 불만을 잠재우며 내부 결속의 명분이 됐다.
하지만 핵을 포기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주민들을 이끌 선동 슬로건이 없을 때 전체주의 정권은 위기를 맞을 수 있는데?
"정확한 지적이다. 핵 포기를 하면 동요하는 주민들에게 체제 정당성을 뒷받침할 근거는 급속한 경제 발전밖에 없다.
이후 10년간 연평균 실질 경제성장률 10%를 달성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도 "북한이 핵을 버리면 위대한 경제 발전을 할 수 있다"고 언급했지만,
10년간 10%씩 성장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절대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정치 이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불편한 진실은, 북한에 최소한 연 300억달러(약 32조원), 10년간 3000억달러의 경제개발기금이 필요하다.
인프라 건설, 인력 자원 개발, 인력 동원 임금, 공공기관 설립, 개방의 부작용을 막을 사회보장제도 등에 소요된다."
방찬영 키메프대학 총장과 최보식 선임기자
―천문학적 돈 문제에 직면하는데, 트럼프는 "한국·일본·중국이 부담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트럼프는 북핵 해결에만 관심 있지, 남북한의 공동 번영 문제는 자신의 일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한국이 대부분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북한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가장 큰 수혜국은 한국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큰돈을 내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북한에서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정치 이념 체제를 바꾸는 데 정책 목표를 둬야 한다.
김정은을 만나 '경제가 발전하려면 김일성주의를 버리고 정치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그렇게 조언을 할 리도 없고, 북한이 자신의 '체제 존엄'과 관련된 말을 들을 리도 없다.
"그런 정치 개혁을 하지 않은 채 비핵화에 이은 경제 개방을 하면 북한은 급속히 와해하거나 혼란에 빠진다.
문 대통령이 말한 남북한 공동 번영과는 반대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만약 북한 주민의 10%가 남한으로 내려오면 이를 감당하는 데만 25조원이 필요하다."
―총장께서는 2년 전 나와 인터뷰했을 때 '김정은은 경제 지도자가 될지,
암살당하는 독재자가 될지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지금 김정은은 그런 선택의 시점에 섰다. 수령 유일 영도 체제를 탈피하지 않고는 핵 없는 북한을 끌고 갈 수 없다.
북한 존속을 원하면 이념을 바꿔야 한다. 김정은은 영리하니까 북한 경제가 얼마나 버틸지를 알 것이다.
그가 위대한 지도자로 남을지, 아니면 역적으로 남을지는 조만간 판명될 것이다."
―인민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독재자는 없다.
"당장 민주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체주의 체제에서 공산당 독재 같은 권위주의 체제로 가고,
경제는 자유시장주의로 풀어놓아야 한다. 북한이 개방하려면 이런 2원화가 이뤄져야 한다."
―김정은은 자신의 위치가 위태로워지는 체제 변경은 못할 것으로 본다. 개방은 경제특구에 한정될 것이다.
일반 주민들에게는 외국인들과의 접촉, 외부 정보 유입 등을 엄격하게 차단할 것으로 본다.
"개방은 외국 기업이 들어와 법적 보호 속에서 기술 이전과 경쟁, 투자 유치, 금융 등이 제약 없이 이뤄지는 걸 말한다.
지금 북한에는 16개 경제특구가 있다. 누가 투자하는가. 투자하면 다 잃는데.
전체주의 국가는 글로벌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릴 수도 없다."
―우리 정부에서는 일단 개성공단 재개부터 시작할 것 같다.
"개성공단 10개를 열어도 북한의 경제 발전과는 무관하다. 개성공단에서 자유로운 경제 활동이 가능했나.
민간기업이 돈 버는데, 왜 정부가 세금으로 지원을 해주고 전기를 보내줘야 하나.
한국 정치인들이 이런 사실을 외면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북한 주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면 북한 경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가?
"물론 돈을 주면 도움은 되지만, 이는 마치 아프리카 잠비아에 원조해주는 것 같다. 한국이 개성공단 문을 닫으니 끝났다.
북한 경제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됐나. 더욱이 개성공단 근로자 임금을 주면 북한 정부가 받아서 80%를 착복한다.
그걸로 통치 자금을 만들고 핵을 만들고 군대를 먹인다.
김대중 정부 시절 남북 경협을 할 때, '돈을 지원해주는 것보다
북한이 민간기업의 활동을 인정하고 시장경제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내가 말했다.
물론 먹히지 않았다."
―정치 이념 체제가 안 바뀐 상황에서 경제적 지원은 결국 김정은과 그 정권의 통치 자금이 된다는 뜻인가?
"잘 봤다. 개성공단 임금도 정권의 통치 자금으로 들어갔다.
기업의 사유화가 이뤄지고 외부 투자가 들어가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할 수 없으면 그런 돈은 북한에 절대 주면 안 된다.
이는 북한의 경제 발전과는 상관없다."
☞방찬영 총장은 ? |
1975년부터 미국 샌프란시스코대 교수 겸 아시아문제연구소장을 맡아 구(舊)소련의 경제 문제 전문가로 알려졌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에서 강연했고 고르바초프와도 면담했다. 그 뒤 소련 연방인 카자흐스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과 연결돼 개혁·개방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카자흐스탄에 시장 경제를 담당할 인력 양성을 위한 대학 설립을 제안했고, 1992년 중앙당 공산당 간부학교 건물에 키메프대학을 세웠다. 대학 지분 중 60%는 그의 소유, 나머지 40%는 국가가 갖고 있다. 이 대학은 서방 교수진에 의해 영어로 강의하며, 등록금만으로 대학을 운영한다. 최고의 취업률을 자랑하고 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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