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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국책 연구소의 줄타기

바람아님 2018. 6. 6. 08:18

(조선일보 2018.06.06 이진석 논설위원)


얼마 전 퇴직한 어느 국책 연구소 연구원은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나라가 네덜란드"라고 했다.

10여 년 전 네덜란드에서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인 CPB(경제정책분석국) 연구원과 만난 뒤부터라고 했다.

"둘이 토론하다가 자료를 확인할 일이 생겼는데 담당 공무원에게 전화해 '관련 자료를 바로 보내달라'고 요구하더라.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맡은 분야의 정책 관련 법안 검토 보고서는 내 서명이 들어가지 않으면

의회에서 심의를 시작조차 할 수 없다'고 하더라."

그는 "우리는 꿈도 못 꿀 일"이라고 했다.


▶우리 국책 연구소들은 '정권 옹호 연구소' '부처 부설 연구소' 등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경제, 사회 분야가 그렇다. 성장률이나 물가 상승률 등 연구소가 내놓은 민감한 숫자가 청와대나 부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사달이 나기 일쑤기 때문이다. 원장이 불려다니고, 예산 감축 소문이 돈다.

눈치 없는 보고서를 쓰거나 발언을 한 당사자들은 감봉, 경고를 받거나 갑자기 사표를 내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만물상] 국책 연구소의 줄타기


▶노무현 정부 시절 TV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종합부동산세를 비판했던 한 국책 연구소 고참 연구원은 3개월

직위 해제와 외부 활동 금지라는 '재갈'이 물렸다. 이런 식이니 눈치만 늘고, 해야 할 말은 못 한다.

이래서 국책 연구소들의 경제·산업 분야 전망은 제대로 맞는 법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성장률도 정부 눈치 보면서 최대한 높여 발표하니 늘 빗나간다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최근 발표한 최저임금 보고서가 절묘했다.

앞부분은 "올해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고용 감소가 별로 크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정부 편을 들었다.

뒷부분에선 "최저임금이 계속 인상될 경우 고용 감소가 내년 9만6000명, 2020년 14만4000명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부 눈치도 좀 보고, 쓴소리도 좀 섞었다.

그래도 정부에서는 "최저임금 보완 대책 3조원의 효과 등을 빼고 계산했다"고 타박하긴 했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훈민정음 창제 직후 한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글자가 너무 쉬우면 백성들이 국법을 쉽게 생각해 업신여길 수 있다"고 했다.

세종이 만든 집현전에서 18년 근무한 최고참인데, 임금이 몸소 한 일을 대놓고 비판했다.

그랬어도 하룻밤 옥살이하곤 그만이었다.

요사이 국책 연구소의 정부 비판이 잘 안 들린다.

아이가 힐끔힐끔 눈치를 보면 그건 아이 잘못이 아니라 어른이 잘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