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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思父曲 어느 덧 50 년…

바람아님 2018. 6. 10. 10:03

(조선일보 2018.06.09 김은중 기자)


[김은중 기자의 쇼타임]

"文대통령님, 金위원장님… 제발 우리 아버지 돌려보내주세요"
1969년 납북된 대한항공 YS-11기… 당시 두 살이던 황인철씨의 외로운 투쟁기



황인철씨가 납북되기 전의 부친과 함께 찍은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속 왼쪽이 황씨, 오른쪽은 그의 여사촌이다.

그의 아버지 황원씨는 1969년 납북됐다. 황씨는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고, 남은 것은 사진 두어 장뿐”이라고 했다.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며 지난 20여 년을 아버지 송환 운동에 바쳤다. 그는 “북한이 납북자들을 돌려보내 남북 화해에

대한 진정성을 보여달라”고 호소했다./사진=이태경, 그래픽=이철원 기자


1969년 12월 11일.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대한항공 YS-11 항공기 안에는 승무원 4명과 승객 47명이 타고 있었다.

영동방송(현 MBC 강원영동)의 3년차 PD였던 황원(당시 32세)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보도부장을 대신해 떠난 서울 출장길. 전날 부부싸움을 하고 나온 터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비행기는 이륙한 지 10분 만인 낮 12시 25분쯤 대관령 상공에서 승객을 가장한 간첩 조창희에 의해 북으로 납치됐다.

그는 돌을 막 넘은 아들, 백일이 갓 지난 딸이 있었다.


그때의 핏덩이 아들이 쉰 넘은 중년이 됐다. 황인철(51)씨는 아버지 송환 운동에 20년을 바쳤다.

통일부와 외교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지만, 우리 정부는 '고도의 정치·외교적 사안'이라며 회피했다.

북 정권은 아예 대꾸도 없었다. 오기가 생겼다. 국제법 책을 펼쳐놓고 난생처음 듣는 조약과 국제 협약을 공부했다.

100만인 서명을 받고자 팔도를 누볐고, 제네바와 뉴욕에서 '눈물의 증언'도 했다.

그렇게 부친의 납북 문제를 국제 사회에 공론화했다.


12일은 미·북 정상회담. 지금 이런 얘기를 하면 "산통 깨지 말라"는 면박이 돌아온다. 필부(匹夫)가 아니다.

민주당 박범계 수석 대변인이 태영호 전 북한 공사에게 했던 말이다.

상대방이 불편해할 만한 주제는 꺼내지 말자는 것일까.

하지만 미국은 북한이 그동안 억류했던 자국인 3명을 석방시키고 나서 회담을 시작한다.


지난 3일 가톨릭대 부천성모병원에서 황씨를 만났다.

그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이대로 묻히고, 지난 20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하고 두렵다"고 했다.


출장 간 아버지, 49년째 부재중


1969년 KAL기가 납북된 후 국제사회는 뒤집어졌다. 비난 성명이 쏟아졌고 제재 논의가 잇따랐다.

거듭된 압박에 북한은 피랍 이듬해인 2월 14일 판문점을 통해 승객 39명만 돌려보냈다.


―북은 처음에는 '전원 송환하겠다'고 했는데.

"돌아오지 못한 11명은 기자인 아버지를 비롯해 파일럿과 승무원, 의사 등이었다. 기술자들만 골라 남긴 거다. 북한은 '그들이 스스로 남기를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피랍됐다 돌아온 사람들은 아버지는 고향에 가고 싶어 '가고파' 노래를 부르고 공산주의 사상 교육을 하는 교관들을 상대로 '너희가 틀렸다'고 쏘아붙였다고 증언한다."


―아버지 납북은 언제 알았나.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항상 '아빠가 미국 출장 중이고 크리스마스에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뭔가 이상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작은아버지가 '이제는 알아야 할 때가 됐다'며 모든 것을 말해줬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은 것은 사진 두어 장뿐이다."


―납북자 가족의 삶은 어땠나.

"초등학교 때 하루는 선생님이 '아버지 뭐 하시느냐?'고 물었다.

어린 마음에 사실대로 얘기하니, 선생님 입에서 월북(越北)이란 말이 나오더라. 납북과 월북을 착각한 것 같았지만,

둘이 잘 구분되지 않는 시대였다. 친구들에게 아버지 얘기를 했다가 '간첩의 자식'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군에 입대할 때는 납북자 가족이란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살아 있을 아버지를 실종신고 해야 했다."


분단이라는 불가항력에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체념하고 가슴으로만 아버지를 그렸다.

전환점이 찾아온 건 2001년. 금강산에서 열린 제3차 이산가족 상봉에서 납북됐던 스튜어디스 성경희씨가 나와

78세의 노모(老母) 이후덕씨와 만났다.

황씨는 "그때 처음 나도 노력하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때 우리 큰딸이 두 살. 딱 아버지가 납북됐을 때 내 나이다.

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버지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

자식을 낳고 가장 예쁠 때 생이별하게 된 아버지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1969년 12월 11일 강릉에서 이륙한 대한항공 YS-11기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공중 납치돼

함흥 인근의 선덕비행장에 착륙했다. 사진은 피랍기와 같은 기종의 여객기. /조선일보DB


―부친에 관한 소식은.

“2013년 ‘수퍼맨’이 찾아왔다. 음지에서 주로 활동하며 3500여 명을 탈북시킨 50대 목사다.

‘아버지가 평양에서 100㎞ 떨어진 평성이라는 곳에 있다’고 했다.

아버지도 한국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곧바로 탈북을 기획했다.

그해 북한이 3차 핵실험을 강행해 국경이 봉쇄됐고 결국 배를 타지 못했다. 그 뒤로 3년 넘게 생사불명이었다.

죄책감에 하루하루를 죄인처럼 살다 다시 연락이 닿은 게 지난해 12월이다.”


혈혈단신으로 외친 ‘브링 마이 파더 홈’


그는 “KAL기 납북 사건은 국제법과 국제기구를 통한 압박으로 해결 가능한 거의 유일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런 일념 아래 1990년대 말부터 도서관을 드나들며 공부를 하고 자료를 찾았다.

어버이날이면 카네이션을 들고 송환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태국 등 제3국에선 “여기서 납북자들의 자유의사를 확인하자”고 시위했다.

유엔인권이사회(UNHRC), 국제적십자사위원회(ICRC) 등 웬만한 국제기구는 다 돌며 북한을 압박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시작했나.

“30여 년 전 발생한 옛날 일이라 다들 관심이 없었다.

2006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북한에 아버지의 생사 여부를 물으니 5년 뒤에야 ‘생사 확인은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1주일 동안 정부 청사 앞에서 1인시위를 했고, 대통령 탄원서도 썼다.

우여곡절 끝에 판문점을 통해 북한의 통일전선부장에게 편지를 띄웠는데 바로 묵살해버리더라.”


―국제사회로 방향을 돌렸다.

“2010년 6월 유엔 산하 ‘강제·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WGEID)’에 부친의 생사 확인을 요청했다.

북한은 2년 뒤 ‘이들(KAL기 납치 피해자)은 강제 실종에 해당하지 않으며, 적대 세력에 의한 정치적 음모’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실망스러운 답변이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뉴욕과 제네바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증언했고, 세계 유수 싱크탱크의 인권 전문가들과 만남을 가졌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랄까. 유엔도 응답했다.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OHCHR)는 2016년 발표한 연례보고서에 1969년 KAL기 납북 사건의 피해자들 사연을 적시하며

“납북자 문제가 지금도 진행 중인 북한의 반인권 범죄”라고 했다.

오랜 시간 부친의 송환을 위해 뛰어온 황씨의 노력도 조명했다. 이영환 전환기정의워킹그룹 대표는

“국제사회가 납북자 문제를 인정하고 해결을 위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의미”라고 평가한다.


―송환운동의 법적 근거는 어디에 있나.

“남북한이 모두 가입해 있는 ‘항공기의 불법납치 억제를 위한 협약’에 따르면 민간 항공기가 불법 납치될 경우

어떠한 예외도 없이 민간인에 대한 인도를 이행하도록 하고 있다.”


―북한 앞에서 국제법은 무의미했다. 순진한 생각 아닐까.

“결국 북한도 국제사회의 일원이다. 어떤 기준이 있어야 발뺌을 할 텐데, 이 사건은 명백한 민항기 납치였다.

증거가 버젓이 있는데 북한도 마냥 부인만 할 수 있겠나. 북한 주장대로 납북자들이 자기 의사에 따라 머물고 있는 거라면,

최소한 제3국에서 자유의사를 밝히게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 정부에 대한 아쉬움은.

“우리 정부는 반박할 근거가 충분한데도 행동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때 납북자를 ‘이산가족’의 범주에 포함시키면서 모든 문제가 꼬여버렸다.

납치 피해자인데 상봉을 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이산가족 대기자가 많으니 순번을 기다려라’는 답만 했다.

2007년 10월 납북자특별법이 제정됐지만 지난 11년간 진전이 있었나.

피랍된 자국민 보호를 위해 북한을 압박하고, 하다못해 거래라도 시도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도움의 손길은.

“그 흔한 장관 면담조차 하지 못했다. 사무관이 커피숍에 불러 놓고 ‘미안하다’만 연신 반복하더라.

국회에서 사진전이나 토론회를 열어도 그때뿐이다.

인권을 외치는 이 정부나, 납북자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전 정부나 다 똑같았다.

대통령은 정상회담과 대북 경협만을 얘기하지, 단 한 번도 당당하게 납북자 문제를 거론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우리 아버지를 비롯한 납북자들을 다 버렸다. 허탈하다.”


―앞으로의 전략은.

“민간 항공기 납치에 관한 협약에 비준한 나라 중 한 곳이라도 관심을 가지면 이 문제는 해결이 가능하다.

미국을 움직이겠다. 그곳 상원의원과 접촉해 청문회를 열고, 워싱턴에서 이슈화하려 한다.

트럼프 대통령을 수신인으로 하는 탄원서도 백악관에 전달했다.

‘미·북 정상회담에서 한국인 납북자 문제를 언급해달라’고 했다.”


“北, 말잔치 말고 진정성 보여달라”

황씨는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인 동시에 세 딸을 둔 가장이다.

“오랫동안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찾지 못한 부족한 남편이자 아빠”라고 그는 고백한다.

송환 운동에 천착하느라 한동안 일을 하지 못했고 자연스레 생활이 쪼들렸다.

2010년엔 신용불량자가 됐다.


―신용불량자라니.

“출판사에서 영업일을 하다 그만둔 게 2007년쯤이다. 영업이라는 게 ‘생각의 벽’이 있으면 안 된다.

나는 몸으로는 서점을 돌며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엔 온통 다른 생각뿐이었다.

하는 일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가장으로서 무책임한 것 아닌가.

“맞는다. 집사람이 나 때문에 많이 고생했다.

생활고가 길어지니 ‘아버지를 위하는 것도 좋지만, 기본적으로 먹고살게는 해달라’고 하더라.

2013년부터 건설 현장에서 ‘잡부(일용직 노동)’로 일하고 있다.

주중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인력사무소에 나가야 생계가 유지된다. 물론 여전히 아이들에겐 미안하다.

정말 고마운 건 그래도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위해 아빠가 고생한다’며 응원을 해준다는 점이다.”


―50년을 기다린 모친은 앓아누웠다.

“납북 사건 이후 어머니는 정신적으로 온전한 삶을 살 수 없었다.

편집성 인격장애를 앓아 사람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다. 3년 전부터 치매를 앓고 있다.

증상이 심하지 않을 때, 아버지 사진을 보여주면 이내 알아보시고 눈물을 흘린다.

‘네 아버지가 제일 멋있다. 살면서 이처럼 멋있는 사람은 못 봤다’고 하신다.

어머니 최고의 한(恨)이 출장 전날 아버지와 부부싸움을 한 것이다.

본인은 아버지가 돌아오면 어떻게 화해할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데….”


―다른 납북자 피해 가족은 보통 어떤 삶을 사나.

“‘아버지는 미국 출장 갔다’는 얘기를 들으며 자란 공통점이 있다. 사실을 깨닫고 나면 사춘기를 진하게 앓는데 상당수는 여기서 인생이 꼬여버린다. 마약을 하거나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도 가고. 인생의 결정적인 시기를 이렇게 흘려보내니 수준 이하의 삶을 살게 된다. 가족이 해체된다. 납북자 피해 가족들이 하나로 뭉쳐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걸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절대로 한반도 평화에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북한이 진짜로 평화에 전향적인 입장이라면, 수사(修辭) 말고 객관적으로 그 진정성을 보여달라는 거다.

정상회담이라는 이벤트 하나 했다고 이렇게 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뀔 수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북한이 바뀌었다는 걸 보여주는 객관적이고도 구체적인 신호가 어디에 있나?

 KAL기 납치와 같은 사안을 해결하는 모습을 북한이 먼저 보여달라. 그게 진정성 있는 태도 변화고 평화의 초석 아니겠는가.”


통일부에 따르면 황씨의 부친과 같이 6·25 전쟁 이후 북한으로 끌려간 납북자는 3800여 명.

이 가운데 생존자는 500여 명이다.

국내외 인권 전문가들의 지적에 우리 정부는 “납북자의 조기 송환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부친의 나이는 올해로 여든하나. 황씨는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더 이상 기회는 없을지 모른다”고 했다.

황씨 모자(母子)의 지난 50년은 그저 개인이 짊어지고 속으로 삭여야 할 불가항력일까.

판문점선언 1조 5항엔 ‘남과 북은 민족 분단으로 발생된 인도적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