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7.11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17년 9월 조선총독부 촉탁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 일행은 고적 조사를 위한 출장길에 나섰다.
백제 옛 땅에 소재한 유적·유물 현황을 파악하는 한편 박물관 진열품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들은 석촌리 고분군을 필두로 능산리 고분군, 쌍릉 등 백제의 왕릉급 무덤을 차례로 파헤쳤다.
12월 17일 출장의 종착지인 나주 반남면에 도착했다. 발굴 대상으로 선정한 무덤은 신촌리 9호분.
봉분의 한 변 길이가 30m 이상, 높이가 5m나 됐다. 12월 20일 발굴을 시작했다.
무덤 속으로 진입하는 널길이 있을 것으로 추정해 남사면을 먼저 파보았으나 흔적이 없자 봉분 중앙부를 파들어 갔다.
약 60㎝ 아래에서 대형 옹관들이 차례로 나왔다.
금동관, 신촌리 9호분, 국보 295호, 국립중앙박물관.
그 가운데 을관(乙棺)은 길이가 2.5m에 달했다. 조사는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사진을 찍은 다음 옹관 조각을 차례로 들어내자 유해는 남아 있지 않았으나 망자에게 착장시켰던 것으로 보이는 금동관,
금동신발을 비롯해 함께 껴묻었던 수많은 유물이 쏟아졌다. 특히 화려한 금동관은 원형을 잘 갖춘 명품이었다.
야쓰이는 "나주군에서 왜(倭) 시대의 유적을 실제 조사했다.
장례 방식과 유물로 보아 이 고분에 묻힌 사람들은 왜인일 것"이라며 출장 결과를 보고했다.
이어 1920년 1월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반남면 옹관묘가 일본 규슈 지역과 유사하다면서
"전라도 남부와 제주도는 왜인이 살았던 곳이고, 오늘날의 조선인에게 일본인의 피가 섞여 있다"고 주장했다.
4~6세기 무렵 영산강 유역에서 꽃을 피웠던 옹관묘 문화는 이처럼 왜곡된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옹관묘 주인공들의 신원(伸寃)에 적극 나선 것은 현지의 고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1960년대 이래 발굴과 연구를 통해 이 지역 옹관묘가 일본 야요이(彌生)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토착적 묘제임을,
옹관묘에 묻힌 사람들은 영산강 수계의 풍부한 물산을 토대로 주변의 다양한 문화를 폭넓게 수용하며 성장을 거듭했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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