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 일대는 한 세기 넘게 외국군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주한미군사령부가 용산 미군기지에서 경기도 평택으로 옮겨가면서 수도의 한가운데 눌러앉았던 외국군 부대의 역사도 마침표를 찍게 됐지만 역사의 흔적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멀리는 16세기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주둔했다는 기록부터 19세기 임오군란, 그리고 일제강점기와 미 군정 시기까지, 국내에 들어온 외국의 군대가 용산의 전략적 위치를 눈여겨보고 핵심 병력을 여기에 주둔시켜 왔던 역사가 되풀이됐던 것이다.
근현대에 외국의 군부대가 현재의 용산 미군기지 일대에 자리잡은 시점은 구한말인 1882년 임오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급료 체불 등에 대한 반발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파병된 청나라 군대가 임오군란을 진압한 뒤 용산 일대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의 청군 병영은 지금의 용산기지 캠프 코이너 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군란을 일으킨 구식 군대의 지지를 업고 섭정을 하던 흥선대원군은 이곳을 방문했다가 청나라 톈진으로 납치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청나라 주둔지에 그대로 눌러앉아 청에서 일본으로 주둔군의 국적만 바뀌었을 뿐 용산의 수난은 계속됐다. 현재의 용산기지 모습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시초는 일본이 1904년부터 러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국내에 진주시킨 ‘한국주차군’ 때부터다. 일본군은 용산에 자리를 잡고 대규모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906년부터 1913년까지 8년간 실시된 1차 기지공사가 완료되자 일제는 한양 일대 주요 지점에 분산 주둔해왔던 일본군 부대들을 용산기지로 집결시켰다. 러일전쟁이 끝나고도 한반도 식민지배를 의도한 전초기지로 활용했던 것이다.
청일전쟁 후에는 승리한 일본군 주둔 조건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교수의 논문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 경리부의 한반도 내 활동과 그 의미’를 보면 일본군이 왜 용산을 점찍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주차군은 전쟁에 동원한다는 목적 외에도 서울 중심에 군용지를 확보해 병영과 군사시설을 세우는 한편 군사목적에 필요한 교통시설까지 건설하는 조직으로 활동했던 것이다. 조 교수는 “한국주차군은 당시 전방부대 지원과 후방의 안정화를 목적으로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국을 군사점령하기 위한 부대였다”며 “군사행정을 총괄하고자 사령부에 설치한 경리부를 중심으로 일련의 작업을 수행했다”고 설명했다.
1910년 일제의 강제적인 조선 병합과 함께 용산 일대와 용산기지에는 한반도 내 일본군의 핵심 주둔지라는 위치가 강화되면서 도로와 전기, 전차 등의 도시 기반시설까지 구축됐다.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전면 개편과 함께 4대문 밖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 행정구역 상으로는 일부가 고양군에 속했던 용산이 경성부에 포함된 것도 이때다. 이와 함께 2차 기지공사가 1922년까지 이어져 현재의 형태와 비슷한 모양으로 기지 경계가 넓어졌다.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기지 구축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조선 내 상주하는 2개 사단이 증설됐고, 군 사령부와 관사 등 각종 건물들이 신·증축됐다. 현재도 용산 미군기지 안에 남아있는 일본군 주둔 시절의 건조물 흔적들은 이 시기부터 만들어져 미군 진주 이후에도 활용된 것들이다.
주한미군이 일본군에 이어 용산에 자리잡은 때는 해방 직후인 1945년이다. 미 24군단 예하 7사단은 서울과 인천에 있던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주요 시설물 보호와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미군 주둔은 당초 단기간으로 계획돼 있었기 때문에 미 군정기를 지나 1948년 남한정부가 수립되자 미군은 400여명만 남고 모두 철수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투입됐다. 본격적인 용산 미군기지 시대가 열린 것은 1957년 주한미군사령부가 창설되면서부터다. 미군이 용산에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진주한 병력은 전쟁 전후로 변화를 겪었지만 일본군이 남긴 용산기지를 재활용해 보수와 증축을 이어가는 식으로 용산기지를 운용했기 때문에 기본적인 기지 구획은 과거 일본의 조선군사령부 때부터 큰 변동 없이 유지돼 왔다.
일본군이 남긴 잔재는 미군기지로 바뀐 뒤에도 현재까지 곳곳에 남아있다. 이태원로를 경계로 남북으로 나누어진 용산기지의 남쪽 사우스포스트 서남단 조선군사령부 터에는 당시 건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콘크리트 벙커가 세워져 있다. 일본군의 1차 기지 건설 당시 군사령부 위치로 지정된 이곳은 한국전쟁 전까지는 국군본부와 미 7사단 사령부가 자리잡기도 했던 곳이다. 사령부와 연결돼 있던 조선총독관저 자리는 121병원과 미군 장성 숙소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총독관저는 불탔고 1960년대 들어 완전히 철거돼 없어졌다. 그 자리에 미군이 새롭게 병원을 지은 것이다. 조선군사령부와 총독관저 건물은 사라졌지만 두 건물을 잇던 지하터널은 폐쇄된 상태로 남아있다.
총독부 시절 고양군에서 경성부로 과거 일본군이 남긴 건물 원형을 아직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은 일제 조선군사령부 장교 숙소였던 주한 미합동군사업무단(JUSMAGK) 건물이다. 이곳은 해방 직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을 때 소련군의 대표숙소로도 쓰였다. 이태원로 북쪽 메인포스트에 있는 한·미연합사령부를 마주보고 있다. 메인포스트 동북단에 있는 일본군 위수감옥 건물도 현재까지 남아 미군이 건물을 활용했던 곳이다. 용산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조선군사령부와 20사단 소속 야포·기마·공병대를 비롯해 위수병원과 위수감옥 등을 기지에 두고 있었다. 이 가운데 일제강점기 헌병대 감옥으로 쓰였던 위수감옥은 비록 중앙옥사는 한국전쟁 때 없어졌지만 감옥을 둘러싼 담장과 부속건물이 남아있어 미군 의무대 건물로 쓰였다.
용산기지 남북을 잇는 구름다리 부근에 있는 일본군 막사와 바로 옆에 있던 미8군 전몰자 기념비도 일본군이 남긴 건축물을 미군이 그대로 활용한 예다. 구 일본군의 상징인 별 모양이 그대로 남아있는 붉은 벽돌의 옛 막사 건물은 미군이 보수해 사용했고, 일제가 1935년 세운 만주사변 전사자 충혼비도 기념물 중앙의 비석만 교체한 뒤 비석을 둘러싼 석제 기념물은 원형 그대로 미군이 전몰자 기념비로 남겨둔 바 있다. 다만 이 기념비는 2017년 평택기지로 이전한 상태다.
일본군이 남긴 건축물 미군이 활용 일본군이 주둔하기 전부터 조선왕조가 세워두었던 문화재가 미군기지 안에 그대로 남아있기도 하다. 둔지산을 끼고 있는 캠프 코이너에는 남단(南壇)의 흔적이 남아있다. 기우제 등 제사를 올리는 제단이었던 남단의 기단과 돌기둥은 한국전쟁 때에도 파괴되지 않고 남았다.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연구실장은 “캠프 코이너 자리는 임오군란 당시 청군이 주둔했던 곳임을 감안하면 남단은 근현대의 역사를 그 자리에서 쭉 지켜보고 있던 셈”이라며 “기지 반환 후에 제대로 보존하고 역사적 의의를 살펴봐야 할 문화재”라고 말했다.
청과 일제, 그리고 미국까지 용산에 자리잡았던 외국군대의 주요 주둔지는 현재 우리가 용산기지라고 부르는 곳이지만 사실 근원을 따져보면 보다 과거에는 ‘용산’이란 지명은 현재의 용산기지보다 서쪽에 있는 낮은 산맥을 가리켰다. 한양도성의 서쪽인 서대문구 안산 자락이 남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가 한강을 향해 구불구불 나아간 모양이 용의 모습을 닮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현재의 효창공원과 원효로 서쪽 일대의 구릉지가 본래의 용산이고, 미군기지와 삼각지, 이태원 등이 자리잡은 일대는 신용산이라 불리다 ‘신’을 빼고 용산으로 굳어지게 됐다.
본래의 용산은 도성에 바로 접해 있으면서 한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조정의 군수창고 기능을 했던 군자감 등이 자리잡는 등 전략적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당시 한양에 머무른 왜군이 이 일대에 자리잡은 이유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현재 원효로4가의 주택가 한편에 있는 ‘왜명강화지처비’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한양에서 철수하기 전 용산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사료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한양을 지나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진격해 갔으나 조선 관군과 의병이 체제를 정비하고 명나라 군대까지 파병되면서 전황은 왜군에 불리하게 돌아가게 됐다. 1593년 행주대첩에서도 패한 왜군은 한양 철수 전 강화를 맺고 최대한의 실리와 퇴로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 상황에서 전투로 인한 병력 손실을 피하기 위해 왜군과 적극 강화협상에 나선 명군이 강화를 맺은 곳에 세운 비석이 바로 왜명강화지처비인 것이다.
용산에 외국군이 주둔한 역사를 고려시대 몽골군에서부터 찾는 경우도 있지만 몽골군 용산 주둔에 관한 명확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용산에 외국 군대가 자리잡은 최초의 기록은 임진왜란 당시 주둔한 왜군이 남긴 것이다. 김천수 연구실장은 “고려 때 몽골군이 이 일대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고려의 수도는 개성이기 때문에 이곳에 주둔할 이유도 없었다”며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 때 주둔한 왜군도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원효로 일대에,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는 갈월동 부근에 주둔했기 때문에 현재의 용산기지와는 다소 떨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강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전략 요충지 용산기지 바깥에 있는 외국군 주둔의 흔적은 ‘왜명강화지처비’나 용산구 후암동에 있던 ‘호국신사’ 터 앞 108계단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도시개발 과정에서 사라졌다. 반면 군기지 내부에 있고 미군이 기존 건물을 재활용하는 방침 덕에 남아있는 역사적인 건축물들은 용산기지 안에 집중적으로 보존된 실정이다. 한국 정부가 확인한 바로는 용산기지 내 1245개 건물 중 1952년 이전에 지은 건물은 일제강점기 병영시설 등 132동에 달한다. 기지 내부를 조사한 바 있는 안창도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는 “내부를 들여다봐야 국가문화재나 시·도문화재 또는 등록문화재로 분류하고 등급을 지정할 수 있다”며 “건물 수도 많고 자료도 일본과 미국 등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단시간 내에 조사를 끝내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용산 미군기지를 공원으로 시민들의 손에 되돌려주는 과정에서 이러한 역사성을 고려하는 한편, 외세의 영향 못지 않게 용산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원주민들의 생활상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또 문화재 외에 물길이 살아있는 만초천의 흐름을 복원하고 느티나무 군락 등 생태적 가치가 높은 지점들을 보존하는 과제도 남아있다.
학계에서는 일제가 일본군을 주둔시킬 기지를 건설하기 전 원래의 지명인 ‘둔지미’ 일대에는 약 1만4000가구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에 있는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서 찾아낸 ‘한국 용산 군용 수용지 명세도’에는 일제가 군용지를 수용하면서 가옥과 묘지, 전답의 규모를 파악해 그에 따라 약 1000만㎡(300만평)에 이르는 군용지를 수용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원주민의 거센 반발로 수용규모는 3분의 1가량인 118만평으로 줄었다. 김천수 실장은 “당시 둔지미에 살다 강제이주된 주민들의 후손이 용산구 보광동 등지에 일부 정착해 있는데 단순히 역사적인 건축물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던 사람들의 삶까지 함께 고려한 복원이 될 때 더욱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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