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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선의 트럼프 연구] 적과 동지 헷갈린 트럼프 외교의 막장극

바람아님 2018. 7. 22. 06:30

(주간조선 [2517호] 2018.07.23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7월 16일 헬싱키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은

워싱턴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트럼프의 예측불허 발언에 워싱턴이 들썩이는 일은

일상다반사이지만 이건 정도가 달랐다. 민주, 공화 할 것 없이 당 지도부가 일제히

들고일어났고, 친트럼프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폭스뉴스의 앵커까지 격분했다.
  
   지난 대선 이후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은 정치적으로 폭발력이 큰

이슈였다. 러시아가 미국 선거 과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미국 민주주의에

그보다 더 큰 위협은 없다는 위기감이 컸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 순방을 떠나기

전 미국은 민주당 힐러리 캠프 전산망 해킹 혐의로 러시아군 정보요원 12명을

기소했다. 미·러 정상회담 전 미국 입장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미 정보당국의 조사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푸틴이 미 대선에 개입한 적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를 향해 자신은 미국 정보기관을 믿지 않고 몇 시간 만난 푸틴의 말을 믿는다고 말하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미국에선 당장 ‘반역적’이란 말이 나왔다. 아무리 예측불허에 전통 무시, 상식 도전의 대통령이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했다, 위험하다고들 했다. 미·러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트럼프는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워싱턴 반응이 트럼프의 상상을 벗어날 만큼 악화돼 있는 걸 확인한 후 참모들의 간곡한 설득에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고 인정했다. 트럼프도 놀라긴 놀란 모양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공화당 하원의원들을 만나 “내가 어제 기자회견에서 ‘러시아가 (대선 개입을) 저질렀다

(would be)는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고 한 말은 ‘러시아가 저지르지 않았다(wouldn’t be)는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했다. 부정의 부정을 하려다가 실수했다는 얘긴데 변명이 하도 옹색해서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건 단 한 문장, 한 단어의 문제가 아니라 그날 회견 전체가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푸틴과 함께 선 트럼프는 어쩐지 약해 보였다. 러시아를 20년 넘게 통치하면서 국제질서는 무시해버리는, 그래서 미국이

이끄는 서방의 제재를 받는 러시아 대통령 앞에서 잘 지내보자고 웃음을 건네는 트럼프를 사람들은 견딜 수 없어 했다.

이젠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가 아니라 ‘러시아 우선’ ‘푸틴 우선’이냐며 트럼프를 조롱했다.
  
   정치의 첫걸음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일이라고 한다. 국제정치도 마찬가지다.

누가 적이고 누가 우방인지 헷갈리면 외교도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오랜 우방인 나토(NATO)와 EU를 적으로

몰고 압박해 방위비 지출을 늘린 성과에 기뻐하면서, 또 한편으론 미국을 위협하는 푸틴과 잘 지내기로 했다며 좋아한다.

크림반도 합병 등으로 궁지에 몰렸던 푸틴은 트럼프와의 만남으로 국제사회에 정상 복귀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북한 김정은과 마찬가지다.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는 국내정치용이다.

미국인들의 반쯤은 이 구호에 열광한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다르다.

트럼프의 예측불허 외교가 주는 파장은 역설적으로 예측가능한 리더십이 국제사회에 핵심적인 공공재라는 걸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