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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만에 베이징대 대자보…비판 대상은 시진핑이었다

바람아님 2018. 7. 23. 08:53
[중앙일보] 2018.07.22 05:00
2016년 중국판 걸그룹 '56꽃송이'의 공연에 등장한 시진핑 개인숭배 화면 [중앙포토]

2016년 중국판 걸그룹 '56꽃송이'의 공연에 등장한 시진핑 개인숭배 화면 [중앙포토]


[예영준의 차이 나는 차이나] 붓글씨 대자보에 시진핑 통렬 비판  
  
#1. 지난 5월 4일 오전 11시쯤, 베이징대 캠퍼스 중심의 산자오디(三角地) 광장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백발 성성한 70대 남성이 붓글씨로 쓴 대자보 24장을 게시판에 빼곡이 붙였다. 1989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천안문 시위 진압 이후 29년 만에 베이징 대학에 출현한 대자보였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당장(黨章ㆍ공산당 당헌)을 지켜라, 중국은 결단코 개인숭배를 반대한다. 헌법을 지켜라, 국가지도자는 반드시 임기제한 규정을 실천해야 한다” 
 
5월4일 베이징대에 29년만에 나타난 대자보 24장 가운데 일부. 시진핑에 대한 개인숭배와 집권 연장 움직임을 통렬하게 비판한 내용이다. [트위터]

5월4일 베이징대에 29년만에 나타난 대자보 24장 가운데 일부. 시진핑에 대한 개인숭배와 집권 연장 움직임을 통렬하게 비판한 내용이다. [트위터]

 
글자수 1만여 자에 이르는 대자보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에 대한 개인숭배 강화와 지난 3월 개헌을 통해 3연임 금지 규정을 철폐한 것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국가의 운명을 한두 사람의 손에 맡기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어록을 인용하며 “시진핑은 마오쩌둥(毛澤東) 이후 처음으로 종신집권을 하려 한다”고 성토했다. 
 
작성자는 덩샤오핑 장남 절친 
이 남성은 교직원과 경찰에 의해 학교 밖으로 끌려 나왔고 대자보는 10여 분 만에 철거됐지만 현장에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 촬영된 동영상을 통해 대자보 사건은 외부에 알려졌다. 
 
베이징대에 시진핑 비판 대자보를 게시하고 주위에 모인 학생들과 대화하는 판리친 [유튜브]

베이징대에 시진핑 비판 대자보를 게시하고 주위에 모인 학생들과 대화하는 판리친 [유튜브]

 
대자보 작성자는 베이징대 동문인 판리친(樊立勤ㆍ73)이었다. 덩샤오핑의 장남 덩푸팡(鄧樸方)과도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그가 ‘거사일’로 선택한 날은 반제국주의 학생운동인 5ㆍ4 운동 99주년 겸 베이징 대 창설 120주년 기념일이었다. 시진핑 주석이 베이징대를 방문해 “대학은 사회주의의 건설자와 후계자를 기르는 근본 임무에 전력하라”고 연설한 이틀 뒤였다. 
 
최근에는 시진핑 사진 훼손 확산
#2. 대자보 사건 두 달 후인 지난 4일 상하이에서 또 다른 소동이 일어났다. 둥야오칭(29)이란 이름의 여성이 상하이 도심에서 공산당 선전 포스터에 큼지막하게 인쇄된 시 주석의 사진에 먹물을 뿌리며 “시진핑의 독재와 폭정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장면을 유튜브에 올렸다.  
 
지난 4일 상하이 한 여성이 중국 인터넷에 올린 동영상에서 시진핑 초상화에 먹물을 투척하는 장면. [사진=RFA 웹사이트]

지난 4일 상하이 한 여성이 중국 인터넷에 올린 동영상에서 시진핑 초상화에 먹물을 투척하는 장면. [사진=RFA 웹사이트]

 
그 뒤 중국 각지에서 이를 모방해 시진핑 사진이 인쇄된 포스터나 선전판을 훼손하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불경행위’의 확산을 보다 못한 당국이 거리에 내걸린 시 주석의 초상화를 철거하고 다른 내용의 선전물로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범상치 않은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11일 국영 신화통신 홈페이지에 ‘화궈펑(華國鋒)의 사죄’란 제목의 기사가 게재됐다. 1976년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돼 당 주석에 올랐던 화궈펑의 초상화를 마오의 초상화와 나란히 걸게 한 일 등이 1980년 당 기율위에 의해 ‘개인숭배’로 규정됐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이 사건은 화궈펑이 권좌에서 밀려나고 덩샤오핑이 실권을 잡게 되는 계기가 됐다. 
 
문제는 오래 전에 작성돼 배포된 기사가 이제 와서 신화통신 홈페이지에 다시 떴다는 점이다. 시 주석 개인숭배에 반감을 품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실수를 가장해 올렸거나, 신화통신을 장악하고 있는 공산당 선전부 내에 노선 대립이 있다는 억측을 불러 일으킬 만 했다. 하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은 채 기사는 곧 삭제됐다.  
 
언론 통제 불구 개인숭배 반감 여전
분명한 사실은 1인 숭배에 대한 반감이 중국 사회에 뿌리 깊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베이징대 대자보 사건이 지식인의 반감을 상징한다면 상하이 먹물 사건 이후 퍼진 모방 사건은 일반 민중의 거부감을 보여준다. 개인숭배에 대한 알레르기는 중국을 10년 암흑기로 몰아넣었던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마오쩌둥에 대한 1인 숭배에서 출발했다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하지만 이런 반감이 조직적 저항 운동으로 확산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2016년에도 시진핑의 독주에 대한 반대를 표출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금세 유야무야된 전례가 있다. 당시 시 주석은 지식인 대표 70명을 불러 놓고 “설령 의견이 옳지 않더라도 트집 잡거나 낙인을 찍고 몽둥이질을 해서는 안된다”고 발언했으나 그 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전례 없이 강화된 언론 통제와 인터넷 검열이었다.  
 
당국도 자체 제동으로 확산 방지 부심
하지만 이런 산발적인 움직임이 과도한 개인숭배 확산에 제동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시진핑 주석의 발언이나 동정으로 도배되던 관영 중국중앙방송(CC-TV) 뉴스나 당 기관지 인민일보 1면에서 시 주석 보도 비율이 다소 줄어들었다. 대신 푸대접 신세이던 리커창(李克强) 총리의 기사 비중이 높아졌다. 이 때문에 공산당 내부의 반(反)시진핑 세력의 반격으로 보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27일자 인민일보 1면 지면(왼쪽). 제19차 당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이 총서기에 재선임된 내용을 전하며 사진을 지면의 절반 가까운 크기로 게재했다. 오른쪽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시절인 2007년 당대회 당시 인민일보 1면. [사진 인민일보 캡처]

지난해 10월 27일자 인민일보 1면 지면(왼쪽). 제19차 당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이 총서기에 재선임된 내용을 전하며 사진을 지면의 절반 가까운 크기로 게재했다. 오른쪽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시절인 2007년 당대회 당시 인민일보 1면. [사진 인민일보 캡처]

 
하지만 시 주석은 예정대로 19일 중동ㆍ아프리카 순방길에 올랐다. 시급한 당내 분란은 없다는 의미다. 그 보다는 중국 당국이 수위 조절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 사회 저변의 여론을 감안할 때 개인숭배는 권력자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는 초(超)민감성 사안이다. 더구나 7월 말∼8월 초 공산당 고위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를 앞둔 시점이기에 더욱 그렇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마오쩌둥처럼 개인숭배로 비판받는 시진핑 2기
2012년 시진핑(習近平) 주석 집권 이후 전 중국은 학습 열기에 빠졌다. 인민일보는 시 주석 집권과 동시에 ‘두 가지 공부로 하나의 목표를 이루자’는 뜻의 ‘양학일주(兩學一做)’ 캠페인을 펼쳤다. 두 가지 중 하나는 당장(黨章), 다른 하나는 시진핑 동지의 중요 연설문, 즉 시진핑 어록이다. 이 단어는 지난해 19차 당대회에서 정식으로 공산당 당헌인 당장에 명기됐다.  
 
벽면을 시진핑 주석의 어록으로 도배한 지린성 창춘시의 '시진핑 열차'. [웨이보]

벽면을 시진핑 주석의 어록으로 도배한 지린성 창춘시의 '시진핑 열차'. [웨이보]

 
지난 1일 공산당 창당 기념일을 맞아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시에서는 지하철 객차의 벽면을 공산당을 상징하는 붉은 색 바탕으로 꾸미고 시진핑 어록을 새겨넣은 ‘시진핑 사상 열차’가 등장했다. 역사학자 겸 정치평론가 장리판(章立凡)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마오쩌둥 어록집’을 상시 휴대하고 다녀야 했던 1960년대 문화대혁명기와는 비할 바 아니지만, 최근의 사상 학습 캠페인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중국 대륙에서 가장 강도가 센 것”이라고 말했다. 
 
시진핑 개인숭배 강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 지난해 10월 27일자 인민일보 1면 지면이다. 시진핑 주석이 19차 당 대회를 통해 총서기에 재선임됐다는 기사를 보도하면서 그의 사진을 지면의 절반 가까운 크기로 게재한 것이다. 이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시절인 2007년 당대회 당시 똑같은 내용의 기사를 보도한 인민일보 지면과 확연히 대조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