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7.26 유석재 기자)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 풍납토성 '왕성 유적' 발견 20주년
"아파트 공사장, 금맥처럼 박힌 토기들… 백제 王城이었다"
고고학자인 이형구(74) 선문대 석좌교수는 1997년 1월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서 목격했던 광경이 여전히 생생하다.
학생들과 함께 사적 11호 풍납토성의 정밀 실측을 하다 한 아파트의 공사 현장에 들어갔다.
"지하 4m까지 팠더군요. 그 아래쪽 깊은 곳 벽면에 새까맣게 탄 목탄층이 보였고, 수많은 기와와 토기 조각들이
금맥처럼 박혀 있었습니다…."
지난주 풍납토성을 찾은 이형구 교수. /장련성 객원기자
백제 왕궁 유적의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왕성(王城)이 아니었다면 그 많은 유물이 나올 리 만무했다.
이 교수는 즉시 당국에 알렸고, 계속된 발굴을 통해 더 많은 유적과 유물이 확인됐다.
아파트 공사장에서 본 목탄층은 서기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해 위례성을 불태웠던 때의 흔적이 분명했다.
이 '발견' 이후, 백제 초기의 한 성(城) 정도로 인식됐던 풍납토성은 웅진(공주) 천도 전까지 500년 가까이 백제 왕도였던
위례성이라는 것이 정설이 됐다. 최대 높이 15m, 길이 3.5㎞의 이 대형 성이 수도로 있던 기간은 백제 전체 역사에서 70%,
백제 왕 31명 중 온조왕에서 개로왕까지 21명이 이 성에서 살았다.
이형구 교수가 1997년 1월 4일 서울 풍납토성 내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수습한 토기 조각들을
조사하고 있다. 이 교수의 발견 이후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이라는 것이 정설이 됐다.
/조인원 기자
이 교수는 20여 년 전 그 '발견'을 기념하는
연구서 '서울백제 수도유적 조사연구'
(태양출판사)를 최근 펴냈다. 보고서 같은 외관과
달리 숱한 비화(祕話)가 담겼다. 1981년 대만
유학에서 돌아온 뒤 30년 넘게 서울의 백제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이야기다.
당시 상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강남 개발의 여파로 삼성동과 가락동의
백제 유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근초고왕 무덤으로 알려진 송파구 석촌동 대형
고분군 사이로 도로가 뚫렸는데, 확장 공사로
무덤 한쪽이 잘려나가 단면에 사람 뼈가
노출되는 상황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당국에선 "이거 그냥 민묘(民墓)예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고고학이 무너지는 정도가 아니라 인륜이
처참히 붕괴돼 있구나' 생각한 이 교수는
급히 언론에 현장 상황을 알렸다.
서슬 퍼런 5공 시절, 겁도 없이 청와대에 탄원을 넣었다. 1983년 5월, '실세'인 허문도 문공부 차관이 부른 자리에서
그는 호소했다. "백제 왕릉 유적입니다. 보존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마침내 1985년 7월 정부는 특별법을 제정해
서울 백제 유적을 보존하도록 결정했고, 석촌동 고분군을 사적공원으로 정비해 도로는 지하를 통과하도록 했다. 이 교수는
방이동 고분군과 몽촌토성의 보존을 건의해 성사시켰고, 올림픽대교에서 이어지는 도로가 풍납토성을 우회하도록 했다.
몰이해와 무관심 속에서 온갖 고초도 겪었다. "서울에 무슨 백제 유적이 있다고 그러느냐"는 힐난은 약과였다.
"미친놈" "제가 뭘 안다고"라는 폭언을 밥 먹듯 들었다. 갇히거나 폭행당한 일도 있었다.
정부나 지자체로부터 연구비를 못 받아 자비로 다섯 번 학술대회를 열었다.
이제 서울시에서 발간하는 '서울 600년사'는 백제의 역사를 포함한 '서울 2000년사'로 바뀌었고,
풍납토성은 교과서에도 실렸다.
이 교수는 "풍납토성 보존의 일등 공로자는 인고(忍苦)를 견뎌 낸 주민들"이라며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세계적 왕도 유적인 풍납토성의 가치를 제대로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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