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8.01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국보 91호, 국립중앙박물관.
경성에 머물며 금관총 발굴품을 정리하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는 1924년 4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에게 불려갔다. 경주 주민들의 거듭된 요청으로
고분 발굴을 실시하게 되었으니 책임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신라 고분에 관심이 많았던 차라 단박에 승낙했다.
경주 봉황대 남쪽에 동서로 배치된 폐고분 2기가 발굴 대상이었다.
1924년 5월 10일 조선총독부 박물관 직원들과 함께 발굴을 시작했다.
고분 주변에 여러 채의 초가집이 들어서면서 봉분은 이미 많이 깎여 나간 상태였다.
서쪽 고분의 경우 남아 있는 봉분 지름은 약 18m, 높이는 4.5m 정도였다.
우메하라는 금관총처럼 이 무덤도 봉분만 제거하면 바로 유물이 출토될 것으로 추정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봉분을 제거했지만 고분 상부를 덮었던 돌무지는 지하로 함몰된 양상이었고 유물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무덤 주인공을 안치한 공간이 지하 3m 지점에 자리한 지하식 구조였던 것이다.
유물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24년 5월 19일이다.
이날 토제 방추차(紡錘車) 1점이 출토된 것을 시작으로 매일매일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5월 22일에는 정교한 금령(金鈴), 5월 27일에는 금관이 차례로 발굴됐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연이어 환호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틀 후 토기와 칠기(漆器) 무더기를 조사하던 중 옆으로 쓰러진 토기 2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자(注子)의 형태였지만 의관을 정제한 주인과 그를 어디론가 안내하는 시종의 모습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학계에서는 요절한 왕자를 다음 세상으로 인도하는 모습이라 해석하고 있다.
실제 이 무덤에서 출토된 장신구는 다른 것보다 작아 그러한 추정에 부합한다.
발굴 후 보고서를 준비하던 우메하라는 스승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의 제언을 받아들여 '서쪽 무덤'에 금령총이란
새 이름을 붙였다. 이 금령총이 94년 만에 다시 발굴된다고 한다.
경주박물관의 재발굴로 금령총을 둘러싼 수수께끼들이 풀리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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