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8.08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83년 3월 26일, 경북 울진군 후포리 주민들은 등기산 정상에서 조경수 식재용 구덩이를 파다 석기 34점을 발견했다.
4월 25일 한병삼 관장과 최종규 학예사 등 경주박물관 연구원들은 유적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긴급 발굴에 착수했다.
겉흙을 제거하니 남북 3.5m, 동서 4.5m 규모의 원형에 가까운 구덩이 윤곽이 확인됐다.
주위에는 띄엄띄엄 자연 석괴가 놓여 있었다. 흙을 조금 파냈을 때 그곳에 크고 작은 마제석부(磨製石斧) 여러 점이
쫙 깔려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석부 주변 흙을 노출하던 조사원들은 예기치 못한 발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수많은 인골이 뒤엉킨 채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마제석부, 후포리유적, 국립경주박물관.
석부 발견 지점부터 바닥 면까지는 약 60㎝ 정도의 두께를 이뤘다. 그 사이에 여러 겹의 인골이 겹쳐 있었다.
인골은 최소 40구 이상이 묻혀 있었다. 감정 결과 남녀 비율은 비슷했고 치아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20대가 대부분이었다.
이 유적에선 주민들이 신고한 것까지 합치면 석부 180점, 석제 장신구 4점이 출토됐다.
석부 가운데 큰 것은 길이가 50㎝나 됐다.
최 학예사는 인체 각 부분의 뼈가 제 위치에 놓여 있지 않은 점, 두개골·대퇴골 등 비교적 굵은 뼈만 골라 묻은 점,
2~3구의 인골이 섞여 있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세골장(洗骨葬·육탈 후 뼈를 추려 다시 묻음)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았다. 또한 석기를 분석하여 이 유적이 신석기시대 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했다.
근래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무덤이 해안가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발굴됐다.
신석기인들은 무덤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주검을 처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중에서도 울진 후포리의 사례는 특이한 편이다.
바다로 돌출된 산정에 자리한 자연 구덩이를 묘지로 택해 다수의 인골을 차례로 묻었으며,
세골장으로 장례를 치렀다는 점이 그러하다.
올해로 발굴된 지 35년이 지났지만 이 유적을 둘러싼 여러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새로운 발굴과 연구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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