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는 자연주의 문학의 효시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뛰어난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 25세의 나이에 저널리즘에 뛰어든 졸라는 그 스스로 말했듯 적어도 책 150권 분량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기사를 작성했다. 이제 막 작가의 길로 들어선 시절, 궁핍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는 무려 16년 동안 저널리스트로서 살았다.
그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당시는 언론 경쟁이 치열했다. 1881년 언론 자유에 관한 법이 제정되자, 언론에 대한 각종 탄압들이 중지되면서 신문사도 발행부수도 급증한 것이다.
문학평론, 예술비평, 정치기사뿐 아니라 저널리즘 비평기사도 종종 선보인 졸라는 당시의 언론을 특유의 단호하고 거침없는 문장으로 비판했다. 주 대상은 발행부수 늘리기에 혈안이 돼 끊임없이 사건을 만들어내고, 시답지 않은 짤막한 기사들로 지면을 채우는 ‘가짜 언론’들이었다. 그는 이들을 ‘세속적인 신문’, ‘돈에 목매는 신문’, ‘정파적 신문’으로 구분했고, 바로 이들이 대중을 혼란에 빠트린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그는 건강한 언론의 힘, 즉 ‘미래 사회의 확장을 위해 일하는 힘’, ‘현대 민주주의의 힘’을 믿었다. 그런 졸라가 세상을 발칵 뒤집은 사건이 발생한다. 1898년 1월, 그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를 <로로르>지에 기고한 것이다.
당시 졸라는 의도적으로 사건 조작에 가담한 자들을 실명으로 거론하며 저널리즘 규범을 훼손했다. 그들이 자신을 법정에 세우게 함으로써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가능케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군수뇌부의 음모를 고발한 이 공개서한의 파장은 컸다. 졸라를 공격하는 풍자만평이 곳곳에 등장했고, 신문에선 졸라를 비난하는 글들이 연일 쏟아졌다. 반드레퓌스파 신문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던 때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엄청난 중상모략에 시달려야했던 졸라는 그해 2월, 국방장관에 대한 명예훼손죄로 법정에 출두하고 유죄를 선고받게 된다. 그러나 그 재판으로 검찰수사의 결함이 드러나면서 1899년,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심이 이루어진다.
반유태주의가 창궐하던 시대, 그 누구도 진실을 발설하기 두려워하던 그 시절, 대문호로서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명예가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역사의 공범자가 되지 않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용기를 낸 에밀 졸라. 일각에선 평생을 휴머니스트로, 독립적 모럴리스트로 살아온 그가 진실을 알고도 침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그의 시대나 지금이나 ‘가짜언론’이 판을 치고, 인권이 소거된 극우적 사고방식이나 혐오문화가 광범위하게 퍼지는 건 유사한데 어디에도 그의 후예들은 보이지 않는다.
지식인은 지식판매상으로, 언론인은 샐러리맨으로 전락한 시대, 120년 전 지식인과 저널리스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인간적 양심의 위대한 상징’ 에밀 졸라가 새삼 그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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