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時事·常識

[삶의 향기] 콩나물에 물주기

바람아님 2018. 8. 22. 08:42


중앙일보 2018.08.21. 00:24

 

한 번의 가르침으로 음감 터득을 기대하면 안돼
평화의 감을 키우는 데는 오랜 물주기가 필요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젊은 목사 문익환이 그의 스승 장공 김재준에게 물었다. “교인들이 교회 문밖에 나서기도 전에 잊어버리는 설교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스승이 답했다. “콩나물에 물주기니라.” 콩나물을 키우는 사람은 하루에 대여섯 번 콩을 깔아놓은 시루에 물을 붓는다. 물은 부을 때마다 즉시 다 빠져나가는 것 같지만 그 물기로 자라 콩은 콩나물이 된다. 이 대답을 들었을 때의 느낌을 문익환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정신이 와짝 드는 것을 느꼈다. 설교란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구나. 그래야 사람들의 마음이 자란다 이거지. 잊어버리지 않으면 마음이 썩는다 이거지.” (『혁명의 해일』서문에서)


헬렌 켈러는 18개월 되었을 때 심한 열병을 앓아 눈이 멀고 귀가 먹었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두 개의 통로가 막힌 것이다. 당연 말을 배울 수도 없었다. 통제가 불가능한 작은 괴물로 커가던 헬렌을 인간의 세계로 들어오게 한 것은 그의 만 일곱 살 때 들어온 가정교사 설리반이었다. 설리반은 헬렌에게 아직 남아 있는 외부와의 통로, 촉각을 이용했다.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헬렌이 느끼면 “바람”이라고 손바닥에 써 주었다. 인형을 안고 있으면 “인형”, 접시를 만지게 해서는 “접시”라고 썼다. 헬렌은 손바닥의 글씨를 따라 쓸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다. 그러다 어느 날 헬렌은 선생님이 자기 손바닥에 쓰고 있는 “물”이 지금 자기 손에 쏟아지는 이것, 즉 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빛이 어둠을 뚫고 헬렌에게 들어간 순간이었다. 수천번 수만번 ‘소용없이’ 빠져나가도 설리반은 콩나물에 물을 주었고, 그리고 기적을 이루었다.


바이올린 연주자들은 연주 전에 튜닝(음정 고르기)을 한다. 반드시 한다. 연습 때도 한다. 바이올린은 네 줄로 되어 있는데 밑에서부터 솔-레-라-미, 즉 완전5도 간격으로 되어있다. 연주자는 두 줄씩 같이 켜면서 두 음이 정확한 완전5도가 되도록, 즉 자연의 순수한 2:3 음향이 되도록 조정한다.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선생은 초보의 제자에게 튜닝을 해 준다. 아직은 제자가 완전5도의 음향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기초를 다진 후에야 제자는 스스로 튜닝을 하면서 어떤 소리가 완전5도의 소리인지 터득해 간다. 그 감을 잡는 것이다.


어디 완전5도 음정뿐이랴. 헬렌보다는 훨씬 쉽겠지만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오랜 경험 끝에야 여러 가지 맛을 알게 되고 정의와 사랑 같은 개념을 깨닫는다. 그때까지는 누군가가 지치지 않고 물을 부어준다. 콩나물의 힘을 믿으며, 속절없이 빠져나가는 물을 아까워하지 않고.


종전선언이 머지않은 듯하다. 이 선언 하나로 설마 한반도가 평화의 천지가 되랴. 이 땅에 사는 칠천만의 마음에 평화의 꽃이 피랴. 선언은 순식간에 시루 밑으로 빠져나가기 십상이리라. 평화에 대한 믿음으로 지치지 않고 물을 부어야 평화의 싹이 자랄 것이다. 평화에 관한 한 우리는 초보다.


평화란 두려움이 없는 거다. 나와 다른 생각과 행동과 용모를 만나도 겁내지 않고 대화하고 친해지는 거다. 두려움이 쌓이면 분열과 증오를 낳는다. 이건 전쟁이 매우 좋아하는 거다. 지난 70년간 수시로 우리를 사로잡으려 했고 지금도 곳곳에서 힘을 떨치고 있다. 두려움을 없애려면 만나야 한다. 만나면 알 수 있고, 알 수 있어야 이해하고, 이해해야 좋아한다. 좋아하면 그 관계는 평화롭다.


평화란 또 상대방이 나를 의심하거나 미워하지 않게 하는 거다. ‘위장 평화 쇼’를 하는 상대방과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없다. 어떻게 자기만의 밥상을 차리는 사람이 얄밉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는 의심하고 미워한다. 당연하다. 그동안 우리가 한 것은 대립과 승리, 즉 전쟁을 위한 물주기였으니까. 잊어버린 평화의 감을 되찾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리라.

평화는 남북의 문제려니와 또한 남남의 문제, 우리 삶의 문제다.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