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8.22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77년 5월 29일, 서울시 구의동 소재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발굴의 시작을 알리는 개토제(開土祭)가 열렸다.
정부가 추진하던 화양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부지에서 지름 25m의 큼지막한 고분 1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서울대박물관이 주관하고 여러 기관이 지원하는 방식의 발굴 조사였다.
윤대인, 윤덕향, 최은주 등 조사원들은 토층 확인용 둑을 남기며 조심스레 파 내려갔다.
며칠 만에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정연하게 쌓인 석축(石築)의 전모가 드러났다. 가장 높은 곳은 높이가 1.8m나 됐다.
무덤의 호석(護石)치고는 상당한 규모였다.
게다가 고구려 산성 같은 돌출부가 확인되자 유적의 성격을 둘러싼 의문은 커져 갔다.
장동호(長胴壺), 구의동 유적, 서울대박물관.
정상부에 대한 조사가 본격화하면서 조사원들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네모난 무덤구덩이를 예상했지만 둥근 구덩이의 윤곽이 드러난 것이다.
그 속에선 불타서 주저앉은 기둥과 판재, 온돌이 차례로 나왔고 유물이 쏟아졌다.
1354점의 철기 가운데 화살촉이 1300여 점에 이르렀다.
6월 13일, 김원룡 단장은 긴급히 조사위원회의를 소집했다.
참석한 조사위원 모두 처음 보는 유적이라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 어려웠다.
무령왕릉을 발굴한 바 있는 김 단장은 이 유적을 백제의 장례 전통과 관련지어 해석했다.
1989년에 이르러 새로운 해석의 단초가 열렸다.
서울대박물관 박순발 조교가 몽촌토성 출토품을 정리하다가 고구려 토기를 찾은 것이 계기가 되어 같은 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구의동 유적 토기가 고구려 양식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어 최종택 학예사가 1991년 이래 구의동
유적 발굴품을 새롭게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유적이 고구려의 군사시설임을 밝혀냈다.
서울에 고구려 유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기까지는 이처럼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고고학자들에게 '최초'란 양날의 칼과도 같다.
'치명적 매력'의 이면에는 언제나 해석의 오류라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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