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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19] 프랑스혁명과 칸트

바람아님 2013. 12. 2. 09:36

(출처-조선일보 2011.07.15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면서 프랑스혁명의 서막이 올랐다. 당시 국왕 루이 16세는 파리에서 서쪽으로 약 17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베르사유 궁에 기거하고 있었다. 몇 년 후 단두대에서 자신의 목을 자르게 될 거대한 혁명의 불길이 치솟았건만, 순진한 국왕은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한 채 그날 일기에 '리앵(Rien, 즉 Nothing)'이라는 단 한 단어만 기록했다. 이 말은 사냥을 나가서 짐승을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뜻이라고 한다.

오히려 파리에서 수천km 떨어진 동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에 거주하고 있던 철학자 칸트는 이 사건의 세계사적인 의미를 곧 파악했다. 그는 파리에서 보내오는 '민중의 벗'을 비롯한 다양한 혁명 언론매체들을 읽었다. 그리고 매일 근처 주막에 나가 점심을 먹으며 그의 친구들과 프랑스의 상황에 대해 열정적으로 논평을 했다.

그런데 칸트는 프로이센의 국왕 직속 경찰들이 그 자신과 친구들을 면밀하게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경찰은 그들을 모두 '공공의 적' 명단에 올리고 장기간 감시했다. 경찰 기록에는 칸트가 주막에서 로베스피에르를 위해 건배를 외친 장면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의자 위로 올라간 칸트는 라인 포도주를 잔에 채운 다음 "부르주아들이 일으킨 혁명이라고 해서 의심하지는 맙시다. 부도덕성을 단죄한다고 해도 우리를 동요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고 외쳤다.

당시 칸트가 살던 동유럽 사회는 프랑스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회 모순을 안고 있었다. 귀족과 농민 사이에는 신분과 재산상으로 엄청난 격차가 엄존했고, 대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는 동유럽 각국 출신의 이방인들과 유대인 등이 힘겨운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사회적 불의에 분노하던 철학자 칸트가 프랑스혁명에서 인간 해방의 가능성을 찾으려 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1798년에 그는 이렇게 썼다. "이 현상은 세계 역사에서 절대 망각될 수 없다. 이제까지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 즉 인간의 본성 속에 이미 도덕적인 진보의 가능성이 배태되어 있음을 발견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비록 추구한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으나… 처음으로 자유를 추구했다는 사실이 지니는 가치까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순진한 노철학자는 혁명의 공포정치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압제로 귀결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링크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