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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국립수목원 복수초⋅풍년화가 봄소식 전합니다

바람아님 2019. 3. 24. 07:05

조선비즈 2019.03.23. 05:01


올봄은 성질이 참 급하구나 싶었습니다. 변산바람꽃 소식이 예년에 비해 열흘 이상 빨리 전해지면서 후발주자 바람꽃들의 잠을 깨워놓았습니다. 그 바람에 경기도 광주시의 무갑산도 3월 10일경에 이미 너도바람꽃 세상이 됐습니다.

예년보다 열흘 이상 일찍 핀 경기도 광주시 무갑산의 너도바람꽃.(2019년 3월10일 촬영)

그러다 꽃샘추위가 닥쳐와 겨우내 참고 참았던 폭설까지 퍼부으며 도로 겨울을 만들어버리는가 싶더니 그도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양새입니다.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의 국립수목원

봄이 더디기로 유명한 경기도 포천에 있는 국립수목원에도 봄이 오는 중입니다. 아직은 아침마다 서리가 내리곤 하지만 낮이 되면 나무들의 술렁거림이 느껴집니다. 전시원에는 생강나무와 개암나무가 먼저 피어도 되겠느냐며 서로 눈치를 봅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백당나무의 붉은 열매.

백당나무 열매는 새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지 아직도 그대로라며 투덜거립니다. 바람 불기만 기다리는 무궁화 씨앗은 이소를 준비하는 어린 새처럼 열매방 밖 세상을 연신 기웃거립니다.

무궁화의 벌어진 열매 속에는 아직도 많은 씨가 들어 있다

수목원에서 가장 먼저 깨어나는 풀꽃은 숲의명예전당 옆의 개복수초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어이없게도 소리봉 입구의 복수초한테 1위 자리를 내주는 기현상이 있었습니다. 보통은 복수초가 개복수초보다 늦게 기지개를 펴는데 말입니다.

복수초에게 개화 1위 자리를 내어준 개복수초(가지복수초)

공식적으로는 개복수초를 가지복수초로 씁니다. 하지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국내의 것은 일본의 가지복수초와는 다르기에 개복수초로 보는 게 맞는다고 합니다. 검증도 거쳐야 하고 널리 알려져야 하는 문제도 있다 보니 학문이 발전하면서 달라지는 지식이 일반화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갯버들의 꽃이 핀 버들가지

산림박물관 옆 개울가에는 갯버들이 벌써 다 피어 벌들이 아우성입니다. 갯버들만 보면 하고픈 말이 많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버들가지, 버들개지, 그리고 버들강아지라는 말 때문입니다.

갯버들의 열매(버들강아지)

버들가지는 말 그대로 버드나무의 가지를 일컫습니다. 버들개지는 ‘버들’에다 강아지를 뜻하는 ‘가야지’가 더해진 합성어로 버들강아지와 같은 말입니다. 15세기 때 관형격 조사인 ‘ㅅ’을 넣어 ‘버듨가야지/버듨개야지’로 쓰던 것이 ‘버들가야지/버들개야지’로 되어 18세기까지 쓰였다고 합니다.

국립수목원 산림생물표본관 뒤쪽으로 소리봉이 보인다

현대어로 오면서 이 중 버들가야지는 버들강아지로 됐고, 버들개야지는 버들개아지를 거쳐 버들개지가 됐습니다. 즉, 버들개지와 버들강아지는 동의어이고 둘 다 복수표준어로 인정하는 말입니다.

호랑버들의 꽃이 핀 가지

그런데 버들강아지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에서 제공하는 사전을 보면 버들강아지를 ‘버드나무의 꽃’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물론 버드나무 종류의 꽃 피기 전의 꽃차례에도 부드러운 털이 많으므로 강아지에 비유했다고 볼 수 있긴 합니다.

풍년화의 꽃이 핀 가지

하지만 그건 버들가지라고 불러야 더 정확하지 않나 싶습니다. 버들가지와 버들개지(=버들강아지)의 발음이 비슷하니까 아마도 꽃이 피려는 버들가지의 털 달린 꽃차례의 모습에서 강아지를 떠올리고는 버들가지와 버들개지를 혼란스럽게 사용했을 겁니다.

국립수목원의 관목원 쪽에 핀 풍년화

그러면서 버들개지의 동의어인 버들강아지까지 도매금으로 잘못 사용하는 일이 벌어졌고요. 하지만 버들강아지(=버들개지)는 버드나무 종류의 꽃이 아니라 열매를 지칭하는 말이 분명합니다.

풍년화의 꽃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사전에서 버들강아지의 정의를 보면 맨 뒤에 ‘솜처럼 바람에 날려 흩어진다’라고 되어 있는데, 바로 그 부분 때문입니다. 솜처럼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것은 꽃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모습 역시도 꽃보다 솜털 날리는 열매가 훨씬 더 강아지에 가깝습니다.

국립수목원의 열대 온실 옆에 핀 풍년화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서 예문으로 든 홍성원 작가의 ≪육이오≫라는 작품에 나오는 문장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돌 개천 주위에는 버들강아지가 목화송이처럼 하얗게 피어 있다’에서 보듯 꽃이 아니라 열매를 가리켜 하는 말이므로 ‘하얗게’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목화만 해도 우리가 보는 건 꽃이 아니라 열매이고, 솜뭉치처럼 생긴 그 열매를 대개 꽃으로 착각하고는 ‘피어 있다’라고 표현합니다. 식물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은 그렇게 목화나 버드나무 종류의 솜털 날리는 열매를 열매라고 생각하지 않고 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필자의 유년시절에도 버들강아지와 관련된 기억이 있습니다. 버드나무 종류의 열매를 손바닥에 말아 쥐고 오므렸다 폈다 하면 강아지가 슬금슬금 걸어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걸 여자 짝꿍한테 보여주고는 버들강아지라고 하면서 놀았습니다.

열매가 길쭉해야 그것이 가능하므로 키버들보다는 갯버들의 열매로 그랬을 것입니다. 갯버들은 유사종에 비해 일찍 꽃 피어 열매를 맺으므로 사람들 눈에 잘 띄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버들강아지는 넓게 보면 모든 버드나무 종류의 열매를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있겠지만, 좁게 보면 갯버들의 열매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 문헌을 찾아보면 갯버들의 열매를 버들강아지라고 한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입산이 통제되는 수리봉에서는 커다란 수컷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산림동물원의 백두산호랑이가 탈출한 건 아니고요, 호랑버들 수그루를 만난 것입니다. 버드나무 종류들은 대개 물가를 좋아하지만 호랑버들만큼은 그렇지가 않아서 척박하고 건조한 산등성이에서도 잘 자랍니다.


호랑이의 눈처럼 큼지막한 겨울눈과 꽃차례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입니다. 호랑(虎狼)이라는 말은 원래 한문대로 범(호랑이)과 이리를 뜻하는 글자였다가 명사형 접미사 ‘-이’가 붙으면서 범과 이리의 의미가 아니라 범의 의미로만 쓰이는 단어가 됐습니다.


요즘 국립수목원에서는 풍년화가 제 세상을 만난 듯합니다. 풍년화는 일본이 원산지인 조경수로, 꽃이 많이 달리면 풍년이 든다는 속설 때문에 심는 곳이 점점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여러 품종이 있고 품종에 따라 꽃의 모양과 색과 향기가 조금씩 다릅니다.

가지에 달린 작은 꽃을 가까이서 처음 들여다본 사람이면 이런 꽃이 있을 수가 하는 탄성이 나옵니다. 리본처럼 생긴 꽃잎이 인상적이고,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이 대개 그렇듯 풍년화도 잎 없이 꽃부터 가지마다 다닥다닥 피워댑니다. 키 작은 나무들을 모아놓은 관목원의 몇 군데에서 피고, 그 외에도 몇 군데 더 있습니다.


특히 열대온실 쪽 화단에서 자라는 것은 꽃이 피기 시작한 지 몇 주 지난 것 같은데도 아직도 엄청난 수의 꽃을 매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올해 국립수목원에 풍년이 들 모양입니다. 과연 어떤 풍년이 들까요? 다른 건 몰라도 풍년화만큼은 풍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