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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83〉사랑의 응원단장

바람아님 2019. 4. 11. 08:48
동아일보 2019.04.10. 03:00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충격과 상처를 극복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본 작가 이노우에 히사시의 희곡 ‘아버지와 살면’은 그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다. 딸과 아버지가 이야기에 등장하는데 딸은 23세, 아버지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때 죽었다. 그런데 3년 전에 죽은 아버지가 딸 앞에 나타난다. 딸의 죄의식과 한숨이 죽은 아버지를 불러낸 거다. 작가의 말대로 아버지는 딸의 마음속 환영인 셈이다.
        

아버지는 딸이 트라우마로 인해 번개만 쳐도 원자폭탄을 연상하며 벌벌 떨고,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도 죄의식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사는 게 너무 안쓰럽다. 그래서 응원하러 온 거다. 그의 말처럼 사랑의 응원단장을 자처하며.

아버지는 딸에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라고 조언하지만 딸은 도리질을 한다. 아버지를 죽게 놔두고 도망친 것이 미안한 거다. 실제로는 도망친 게 아니었다. 딸은 원자폭탄에 피폭돼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리려고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딸까지 죽게 생기자 아버지가 설득해 떠나게 했다. 그럼에도 딸은 자기만 살려고 도망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연애를 못 한다. 염치없이 자기만 행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아버지는 그런 딸에게 마지막에 헤어지면서 자기 몫까지 살아달라고 부탁했던 일을 상기시킨다. 자기에게 미안해할 게 있다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면서.


오랜만에 딸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고 아버지한테 고맙다고 말하면서 스토리가 끝나는 것으로 보아 딸은 아버지의 말을 따를 것 같다. 그렇다고 죄의식이나 내적 갈등이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딸은 아버지의 몫까지 살아가면서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 갈 것이다. 스토리 속의 아버지가 딸에게 그러하듯, 비극적인 사건들로 인해 생이별을 하고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몫까지 살아달라면서 우리의 삶을 응원하는 응원단장들일지 모른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